62page


62page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간부로서 활약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5년 1월 15일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란 명목으로 모임을 갖고,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이영국(李永局)·서병룡(徐丙龍)·김 규(金圭)·정순영(鄭舜永)·황병기(黃炳基) 등의 동지와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기밀부장(機密部長)으로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던 해에는 대구에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을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조국광복의 기수가 될 것을 역설하고, 광복회(光復會)·의용민족대동단등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각 민족단체의 지도자들과 계속적인 연락을 취하였다.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서울의 이갑성(李甲成)과 연락을 취하면서, 김태련(金兌鍊)·이만집(李萬集) 등의 동지와 함께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3월 3일 일제의 예비검속 때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출옥 후 대구에서 교남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통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다가 일본 경찰의 강권 발동으로 교직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