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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절공 및 조선의 바다를 수호하신 통어사극재공 같은 충정의 피를 잇고 어려서부터 장충필 지사의 가르침을 받았고 커서는 김동삼 남형우 배천택 이원식 제동지와 애국결사인 대동청년단을 만들어 민족의식의 고취와 지하운동의 전개 및 보성전문재학 중 학생층의 동지 규합 및 졸업 후 임직된 대구은행에서도 동료와 사회인에게 대해 독립방도의 밀의를 함과 함께 손병희 옹의 영도한 천도교의 대구지부에 주간으로 뽑혀 그곳을 동지들의 연락처로 하였던 바, 다행히 한 은행 내에서 이종암 동지를 얻어 1만9천의 거금을 끌어내게 한 다음 아우 상헌을 시켜 그를 비호하게 하여 능히 국외로 독립군자에 이바지하게 하였으며 1919년 3월 거족적 독립운동에 그는 대구에서 일을 들려 했으나 적의 미리 탐지한 바로 되어 수인 1년여에야 나오게 되자 왜관 약목의 청년회를 조직 주도하다가 상해로 건너가 다시 만주 각지로 돌면서 임시정부요인 및 광복군헌들과 독립방도를 협의하고 국경 안동현에서 군자금 전달 및 국내외 투사들의 연락책무를 맡아 활약 중 또 적에게 피체 압환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서 또 1926년 6.10 만세사건 시 허홍제 조중규 채충식 제동지와 항일투쟁을 펴다가 입옥되었으며 1927년 장진홍 동지의 대구 조선은행 폭탄사건의 관련혐의로 구검되었으며 그 이후 신간회 칠곡지부를 결성 활동 중 1930년 금오산 독립단 잠입 사건의 관련혐의로 구검되었으며 1931년 신간회 해산의 반대항쟁으로 구검되었으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국에 다달은 적의 최후 발악으로 모든 애국지사의 총검거 수금이 있었는데 얼마 뒤 병보석이란 명목으로 그가 다시 출옥된 3일 뒤인 8월 15일 드디어 적의 항복으로 일월이 새로 밝고 건곤이 거듭 맑아 민족역사에 새 빛을 더하였으니 그러나 그는 그렇게 끈질기게 싸운 동안 장기유폐가 전후 다섯 해를 넘겼고 일시의 투옥 구속은 이겨 세기 못하였던 바 인도로 상상조차 못할 적의 참혹한 형추의 여독으로 신음 중 광복 6년 후인 1951년 11월 29일 아직 완전 정돈되지 못한 조국을 길이 하직하여 62년의 항쟁 일생을 마쳤는데 그 뒤 1963년 3.1절 비로소 그의 국가중건에 바친 공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