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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 피해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당시 춘천은 구한말 을미의병의 본거지였고 도청 소재지로 일제 관청이 집중되어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일제 경찰의 감시망과 경계가 유독 심했다. 또 국도나 철도가 없어 우마(牛馬)나 북한강 수운 그리고 도보로 교통망이 형성된 곳이라 독립선언서 전달도 쉽지 않은 여건이었다. 한양에서 춘천으로 독립선언서 직접 전달이 어렵자 지금의 북강원도인 천도교 평강교구를 통해 3월 4일 독립선언서 150매를 보내지만 운반요원이 일제의 불심검문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 고장에서는 천도교 춘천교구장 이준용과 윤도순 박순교 선생이 3월 중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도순이 체포되는 바람에 중단된 상태였다.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춘천의 헌병과 수비대에서는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장터와 주요 길목을 지키며 더욱 삼엄한 경계를 폈다.
1919년 3월 28일, 이준용은 춘천읍 요선장날에 맞춰 집에서 가족들과 싸리나무대로 태극기를 만들고는 "다시 집에 못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박순교, 허기준과 함께 태극기를 감추고 장터로 잠입하여 천도 교인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독립선언서가 사전 압수된 뒤 좌초 위기 끝에 나온 만세 소리였다. 비록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지만 요선장터 만세운동은 일제의 방해와 억압 속에서 일궈낸 매우 값진 성과였다. 사북면 오탄리에서는 이교관, 김공모, 최기항이 태극기와 선전문을 만들다가 붙잡혀 가기도 했다.
출처 : 춘천시 시정소식지 봄내 Vol. 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