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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독립운동 • 한글날 제정 61 한글 반포 기념식 이후 열린 좌담회에서는 한글 반포 기념일 명칭으로 ‘가갸날’과 ‘정음날’ 중 무엇 을 채택할지, ‘언문’을 대신할 이름으로 ‘한글’과 ‘정 음’ 중 무엇을 채택할지, 그리고 이 기념일을 기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 어졌다. 후속 논의를 위해 각계의 대표 인사들이 별 도의 실행 위원회인 ‘정음반포기념회’를 구성했는 데, 11월 10일에 열린 논의에서는 ‘언문’을 대신할 이름은 ‘우리글’로, 한글 반포 기념일의 이름은 ‘정 음날’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조선어연구회에서 는 이 결정과 관계없이‘가갸날’과 ‘한글’을 계속 썼 고, 1928년부터는 글자 이름 ‘한글’에 맞춰 그 반포 기념일을 ‘가갸날’에서 ‘한글날’로 바꿨다. 그런데 조선어연구회의 적극적인 활동에 힘입어, ‘우리글’ 과 ‘정음날’보다 ‘한글’과 ‘한글날’이 압도적으로 많 이 쓰이게 되었다. 명칭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 조선어 연구 및 표기 법 제정 등에서의 논쟁으로 이어졌지만, 한글과 관 련한 문제가 논쟁거리가 된 것 자체가 한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면이 있 다. “이번 훈민정음 반포 팔회갑을 기회로 하여 조선 어문에 대한 애정이 민간에 진작된 것은 가하(嘉賀) 할 일이다”란 평가에서 볼 수 있듯이, 1926년 11월 4일의 한글 반포 기념식은 일제강점기 우리말 운동 이 대중화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11월 4일 이후 열린 한글 강연회에는 수많은 청중 이 몰렸고, 이러한 분위기는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 다. 사리원에서 11월 8일에 열린 기념강연회의 소 식을 「의미심장한 가갸날 축하회」란 제목으로 보도 한 기사는 “여러 가지 의견과 감상담의 교환으로 일 반은 신생명의 역동을 맛보는 깊은 인상을 얻어가 지고 동 11시에 산회하였다”로 끝을 맺는다. 한글 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는 것만으로도 “신생명의 역 동”을 맛보았다는 참석자들의 소감은 한글 반포 기 념 행사가 민족적 자의식을 일깨우는 장이 되었음 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한글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글 반포 기념일을 국수적 관념을 주입하는 장으로 활 용하는 데 대한 반발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러한 반 발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무엇보다 민족적 자부심이 필요한 상황에서,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 에 대한 찬양과 한글이 민족정신의 상징이자 민족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호소가 대중적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민족에 대한 자부심으로 승 화하려 했던 이들은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을 ‘표기법을 통일하지 못하고 우리말 사전 하나 편찬 하지 못한 현실’에서 찾았다. 그러니 한글에 대한 자 부심을 키울수록 통일된 표기법과 우리말 사전이 없 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은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가 장 문명화된 문자를 가진 자부심과 통일된 표기법 과 모어 사전이 없는 자괴감의 괴리에서 오는 고통 은 결국 민족어 운동에 나서는 동기이자 이유가 되 었다. 일제의 방해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1929년 조 선어사전편찬회의 결성과 조선어사전의 편찬, 1933 년 『한글마춤법통일안』의 발표, 1936년 『조선어표 준말모음』의 발표 등을 줄기차게 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일제는 표준어사정안 발표 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어학회가 주최하는 모든 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