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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 • 3·1운동 61 생략하고 한용운이 일어나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 표하게 되어 크게 경하합니다. 더 한층 독립을 위하 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인사말을 한 후 일동은 모두 일어나서 만세를 삼창했다. 이어 출동한 일본 경찰 들에게 체포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됐다. 한편 공원 에서는 오후 2시 30분경 육각당에서 선언서를 낭독 한 후에 독립만세를 연호했다. 군중들은 공원을 나 와 동서로 나뉘어 경성 시내를 여러 갈래 로 활보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본 정통(本町通)으로 재집결한 군중들은 경찰 의 제지로 해산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 며 독립만세를 이어갔다. 경찰, 기마병, 군 병력들의 해산 강압에도 해질녘까지 곳곳 에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렸다. 밤에는 경기 고양의 양화진에서 학생과 주민 약 200명이 만세를 불렀고, 오후 11시경 신 촌리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 학생 약 200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2월 중순부터 평안도 · 함경도의 기독교 교직자들은 독립운동의 움직임을 인지했 다. 천도교 측에서는 2월 하순 대표자들 이 조직망을 통해 지방 교직자들에게 통 지했다. 2월 28일부터 3월 1일 사이 교직 자, 신도, 학생 등이 선언서를 지방에 교 부하며 독립선언식이나 선언서 배포와 낭 독 및 독립만세 고창 등 독립운동 실행 방 법까지 전달했다. 그 결과 3월 1일 황해도 해주, 평안남도의 평양 · 진남포 · 안주, 평안 북도 선천 · 의주 · 신의주, 함경남도 원산 등 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손 있는 자, 그 뉘라서 박수치지 않고, 입 있는 자, 그 뉘라서 만세를 부르지 않겠는가? 이어 3월 2일 황해 해주 · 수안, 3월 3일 충남 예 산 · 경남 마산, 3월 5일 전북 군산, 3월 8일 경북 대 구, 3월 9일 함북 회령, 3월 10일 강원 철원 · 전남 광 주 · 담양, 3월 19일 충북 괴산에서 각 도(道)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1운동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관사 태극기(등록문화재 제458 호, 동아일보 제공)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선두 목사의 모습(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