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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2026년 3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3월의 독립운동 일어났다. 3월 1일 서울, 평양 등 전국 10여 개의 도 시에서 천도교계 교구와 기독교계 학생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각 도시 중심지의 대 로를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서울에서는 보름 가 까이 만세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곳에 이선경이 있었다. 3월 5일 아침 8시경 남대문역 앞에서 각급 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시 민들도 합류했다. 수천 명의 군중은 일제 경찰의 저 지를 뚫고 남대문시장, 조선은행, 종로 보신각 등으 로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대한문 앞에 대기 중이 던 경찰은 군중을 향해 돌격했다. 부상자가 속출했 고 수백 명의 학생이 체포되었다. 이선경도 동지 학 생들과 체포되었다.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종로 경찰서에 15일간 구류되었다가 3월 20일 ‘무죄’로 방면되었다. 이후 9월 1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다. 1920년 6월 경성여고보 3학년 재학 중 비밀결사 인 구국민단(救國民團) 조직에 참여했다. 수원 서호 (西湖) 근처에서 수원 삼일여학교 교사 차인재 (車仁 載)의 소개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 최문순 (崔文順), 휘문고등보통학교 박선태(朴善泰) 등을 만 났다. 이들에게 독립운동 동참을 권유받고 구국민단 에 가담해 구제부장으로 활동했다. 구국민단 총장은 박선태, 교제부장은 차인재, 재무부장은 최문순이 맡았다. 이들은 ‘첫째 독립 국가 조직, 둘째 수감된 독립운동가의 유족 구조’를 목적으로, 7월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수원 읍내의 삼일여학교에서 만나 독립 운동 방법을 모색했다. 이때 이선경은 『대한민보(大 韓民報)』 등 항일신문 배포를 담당하기로 했다. 또한 기회를 보아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 부의 간호부가 되어 독립운동에 이바지할 것을 맹세 했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이 필요 했다. 8월 9일 이선경은 상하이로 가기 위해 수원을 출발했지만 서울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강도 높은 심문과 지독한 고문은 해를 넘기도록 계속되었다. 1921년 4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이른바 ‘제령(制令) 제 이선경의 재판 판결문(왼쪽, 국가기록원 제공)구국민단 사건 관련 이선경 재판 보도 기사 (『독립신문』 1921.4.30,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