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page


60page

1907~ 1907년(28세)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발행,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조직 차명 1908년(29세)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 독사신론(讀史新論) 등 발표 1909년(30세)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발표, 신민회의 청년학우 발기 1910년(31세) 소년잡지에 국사사론(國史私論) 발표. 평북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중국으로 망명 1911년(32세) 권업신문〈勸業新聞〉주필 1912년(33세) 항일비밀결사단체인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 1913년(34세)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움 1914년(35세) 조선사(朝鮮史)집필, 백두산, 광개토대왕릉을 현지 답사 1915년(36세) 북경에서 도서관 생활 1916년(37세) 꿈하늘(夢天)을 탈고 1917년(38세) 진남포를 거쳐 서울에 잠입 후 요절한 김기수(金簊壽)의 죽음을 조상 후 다시 북경으로 망명 1918년(39세)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머물며 조선사 집필 1919년(40세) 만주 길림성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大國獨立直畵書)에 민족대표 39명의 사람으로 서명에 참가. 상해임시정부수립에 참가 1920~ 1920년(41세) 북경에서 보합단(普合團)에 참여, 박자혜(朴慈惠)와 결혼 1921년(42세) 북경에서 천고(天鼓) 창간 1922년(43세) 고대사 연구 및 집필에 진력 1923년(44세) 「조선혁명선언」 발표. 북경 석등암에 기거하면서 고대사 연구와 집필 1925년(46세) 사론(史論) 집필에 몰두 1927년(48세) 신간회(新幹會) 발기에 참여 1928년(49세) 「용과용의 대격전」 소설 창작. 북경, 천진에서 개최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대회 참가. 대만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償遺事件)으로 대련 감옥에 투옥 1929년(50세) 대련지방법원에서 제2회 공판 1930년(51세) 10년형 복역이 확정, 여순감옥으로 이감(죄수번호 411번). 홍명희 주선으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 발간 1931년(52세) 조선일보에 조선사(朝鮮史, 1948년 단행본으로 출간때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로 개명」와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발표 1935년(56세) 건강악화로 병보석 출감을 통보하였으나 거절 1936년(57세) 2월 18일 여순감옥에 뇌일혈로 쓰러짐. 2월 21일(음력 1월 28일) 오후 4시 20분 순국. 2월 24일 여순에서 화장 후 청원군 남성면 귀래리 고두미에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