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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1월31일 토요일 6 (제229호) 기 획 「박씨대종보 한빛신문」이 창간 19주년을 맞이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빛이 라는 이름 처럼 문중의 소식과 정신을 밝히는 등불로 자리매김해온 뜻깊은 세월이었습니다. 앞으 로도 종친 모두에게신뢰받는소식지로계속발전하시 기를바랍니다. 顧問:朴秉植.朴祥圭.朴泓箕.朴道文.朴辛在.朴淳燁. 會長:朴義奎. 副會長:朴祐鉉.朴遺植.朴海雄.朴丁濟.朴東根.朴元煥. 監事:朴淳濟.朴鍾憲. 總務:朴熙和. 理事:朴昌相.朴銀鉉.朴永煥.朴淳模.朴湳鉉.朴快基.朴熙在.朴鍾泰.朴興植.朴仁顥 .朴海元.朴海鍾.朴容伯. 朴萬守.朴景 .朴亨濟.朴承濟.朴敦淳.朴龍化.朴東春.朴舜湜.朴東石.朴熙秀.朴錫泰.朴在允.朴在錫. 새 해 에 는 조 상 님 의 음 덕 이 종 친 여 러 분 가 정 마 다 두 루 미 치 기 를 기 원 합 니 다 . 효 와 우 애 , 신 의 와 화 합 의 정 신 을 이 어 받 아 각 자 의 자 리 에 서 덕 을 쌓 고 문 중 의 명 예 를 빛 내 는 뜻 깊 은 한 해 가 되 시 기 를 바 랍 니 다 . 密 城 朴 氏 銀 山 府 院 君 派 大 宗 會 경남창녕군계성면광계리117(광계마을길77) 창평 용담대 자료를 찾아보다가 15세기 초반 1423년에 중건한 용담정(龍潭亭) 기록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알려져 왔던 16세기 의 무등산권 정자 조영 시기보다 100여년 이상이 앞선다. 물론 고 려말조선초의인물전신민과연관되는독수정이있긴하지만,전 신민 당대의 기록은 더 찾아야 할 숙제를 안고 있어서 ‘용담정’에 대한자료는새로움으로다가왔다. 지금은그곳일원에1920년대건립한소산정(小山亭,篠山亭)이 있다. 2004년에 담양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 소산정 의 연혁에,동은당 조은환이 선조 환학 조여심(喚鶴 曺汝諶)이 의 병장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 1533~1592) 등과 더불어 용담대에 서소요하던것을기리기위하여건립한것으로알려져온다. 제봉과용담대관련자료를찾아보고자뒤적이다가1423년창평 현령으로 부임한 국당 박흥생(鞠堂 朴興生, 1374~1446)의 문집인 븮국당선생유고븯에서 븮용담정 중건 서문[龍潭亭重新序]븯글을 보았 다.세주에 ‘창평현 재임시[宰昌平時]’라는 기록이 있어 창평현령 때지은것임을알수있다.박흥생이창평현령으로부임한것은14 23년(세종5)이다.그리고중신(重新)이라한것을보면그이전에 있었던정자를중건했음을알수있다. 중건 서문에는,원래 초가 정자가 있었고들보와 서까래 구조물 은대나무로되어있다고하였다.이건조물이무너져박흥생현령 때다시지은것이다.용담정의중건에대해서술한기록을보자. 븮예전에 초가 정자가 있었는데 들 보와 서까래를 모두 대나무로 만들 었다. 세월이 오래되자그것이 기울 어지고 무너져 겨우 비와 볕만 가릴 뿐이었다. 이에스스로 백성을다스 리며 은근히 홀로 정자를 염원하였 으나백성을다스리는데는지엽적인 일이었다.…무릇 사신이 물가를찾 고, 시인이 시를읊으려고한다면어 느곳이 영감을드러낼곳이겠는가? 이 때문에틈을내어노는사람을시 켜 산에서재목을구하고,들에서풀 을베어오니공사의재물도안 들고백성에게부역도시키지않고옛규모를넓혀 서채색하는일까지마쳤다.그리고는편액하기를,븮이요정븯이라하였다. 이기록은몇가지중요하다.‘옛초정[舊有草亭]’이라하여정자 가 이전부터 있었다는점,단순히 개인적 별서가 아니라 창평현이 라는 고을의 주민들이 공적으로 이용하는 휴식 공간이었다는 점, 박흥생은정자를중건함으로써풍류와학문의전통을이어가려는 의도를분명히하고있다는점,부역도하지않고마쳤다는점등이 다.즉,용담정은조선전기의관(官)이주도하여조영한공공적성 격의 정자였다.이는 후대 면앙정이나 식영정처럼 사대부 개인 별 서성격의정자와는뚜렷이구분되는지점이다. 그런데박흥생현령중수와그이전의초가정자보다더앞선시 기 인물 관련 기록을 볼 수 있다. 븮신증동국여지승람븯권39 창평현 누정조에보인다. 용담대(龍潭臺) [창평]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산록에 기암이 있는데 높이가 백 자나 된다.남쪽으로는 서석(瑞石, 무등산)이 바라보이고, 아래로 는맑은못이있다.이름을용담대라하는데그옆에승사(僧舍)가 있었다.강호문(康好文)의시가있다. 븮신증동국여지승람븯은1530년,그 이전의 븮동국여지승람븯은1481 년본 임으로 15세기 후반에 이곳 일대를 용담대라 했고 승사가 있 다고하였다.이기록만으로는용담대라명명한건조물이있었는지 는알기어렵다.이어지는기록에강호문의시가나온다.1362년(공 민왕11)에과거에급제했으니고려의서정을담고있을것이다. 古刹無僧住(고찰무승주)고찰(古刹)에사는중이없고 門前少客過(문전소객과)문앞으로지나는손이적도다. 臺高春氣早(대고춘기조)대(臺)가높으매봄기운이빠르고 溪近晩렇 多(계근만량다)시내가까워저녁에시원한기운이많다. 古 휼 封苔蘚(고체봉태선)옛섬돌에는이끼가끼었고, 陰廊掛 薇 蘿(음랑괘벽라)그늘진회랑에는칡넝쿨이걸렸도다. 再遊何所得(재유하소득)다시와서노니무엇을얻었는가, 覓句費吟엔 (멱구비음아)시구를짓노라고애써읊조린다. 옛 절에는 승려도 보이지 않고 지나는 길손도 드물다.용담대는 높직하고시내를감고시원한바람이분다.때는이른봄철인듯싶 다.오래된섬돌에는이끼만가득,회랑은칡넝쿨만너울너울.그래 도다시찾아시구를읊조려본다. 이시의작가강호문은고려말기의문신이다.자는자야(子野), 호는 매계(梅溪)이며, 사암 유숙(思菴 柳淑, 1316~1368)의 문인이 다.시문에 능했고,1362년(공민왕 11)에 과거에 급제하였다.박의 중,이숭인,정도전,설장수 등과 동방이다.성균 사예,판전교시사 (判典校寺事)를 지냈다. 1373년(공민와 22)에는 천안부사를 지냈 고 1377년에 천안의 븮영주 남원루 기(寧州南院樓記)븯를 지었는데 븮동문선븯에시3편과함께올라있다.븮신증동국여지승람븯에는창평 현 용담대 시와 함께 양성현,장단도호부,공주목,임천군,고부군, 금산군조에강호문의시가올라있다.양촌권근,포은정몽주의문 집에도강호문과관련있는시가보인다. 1491년(서종 22)에 남효온이 지은 븮담양향교 보자기[潭陽鄕校 寶上記]븯에 담양부 출신 인물로 “재술(材術)로 이름난 이영간(李 靈幹), 공명으로 이름난 이성(李晟), 문장으로 이름난 전녹생(田 祿生)븡강호문(康好文), 돈독한 행실로 이름난 김기븡전근(全謹)븡 송시흥(宋時興)”을 들고 있다. 강호문은 문장으로 알려졌고 담양 과연고가있음을알수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박흥생이 중신 서문을 지은 용담정은,강호 문의 시가 있던 용담대, 오랜된 섬돌만 있던 승사, 무너진 대나무 들보의 초가 정자,이요정이라 명명한용담정으로 네 번째 이어진 것이다. 용담대는 현재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용대마을 증암천 곁에 자 리한다.옛 창평현 지역이다.서쪽으로는 무등산의 장대한 연봉이 뻗어있고,북쪽으로는담양분지의넓은들판이펼쳐진다.동쪽으 로는 증암천의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데,옛 기록에서는 이곳의 물을 가리켜 “청수(淸水)”라 칭하며, 여름철의 더위를 씻어내는 청량한기운을전한다고기록하였다. 앞의 븮신증동국여지승람븯 용담대의 기록처럼, 기암괴석이 솟아 있고맑은연못이있고,남쪽으로서석산,북쪽으로는창평과담양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이다. 용담대의 입지가 단순히 경관 의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산·물·들판이 모두 어우러진 경관 조 망임을알수있다. 실제로 용담대는 예로부터 븮용담(龍潭)븯이라는 이름으로 불렸 는데,이는깊은소(沼)가용이노니는못처럼보였기때문으로해 석된다.그러나제봉고경명(霽峯高敬命,1533~1592)의시 세주에 “토사가 몰려와 용담을 메우니(龍潭 윅 塞)”라 하여, 이미 16세기 중반이후에는본래의깊은소가상당부분메워졌음을알수있다. 따라서 용담대의 원형은 현재보다 훨씬 수려한 계류와 소를 중심 으로한자연경관이었을것으로보인다. 븮동국여지지븯(1656년) 창평현편에는 산천조에 용담암(龍潭巖) 이 나오는데,“산기슭에 기이한 바위가 있어 높이가 백 척에 달한 다.남쪽으로는서석산을바라보고,아래로는맑은못을누르듯자 리하고있다.”는설명을하면서용담대라고한다고기록하고있다. 용담대는용담암으로도불렀음을알수있다. 창평현은담양군고서면,창평면,남면일원에있던고을이다.읍 치는지금의담양군고서면고읍리고읍(구읍)마을로서창평현행 정 중심지였다.창평은 삼국시대에는 굴지현(屈支縣),757년 통일 신라시대에는 기양현(祁陽縣)이었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창평현으로 바꾸었다. 1793(정조 11)년 읍치를 지금의 담양군 창 평면창평리로옮겨갔다.고서면고읍리읍치시절세운역대현감 선정비일곱기가마을입구에보존되어있다. 창평현령 박흥생은 용담정을 중수하고 칠언율시를 짓는다. 븮국 당선생유고븯권1에실려있는다.헌납조사수와제학박희중의차운 시도있다.한국문집총간8집으로영인표점본이나왔다.국당박흥 생과이요당박흥거형제문집국역본도나왔다.이를인용한다. 용담정이중수되자쓰다題龍潭亭重修 韻潭澄碧映危岑(운담징벽영위잠)맑고푸른용담에높은봉우리 비쳤고 古木蒼煙地轉深(고목창연지전심) 푸른 안개 고목에 땅이 더 깊 어졌다 亭爲臺平臨絶堞(정위대평림절첩)평평한대(臺),성벽막힌곳에 정자지으니 臺因亭季出層林(대인정계출층림) 정자 때문에 대(臺)가 수풀보 다빼어나다 水 짬 明月流金影(수용명월류금영)물에밝은달뜨니금빛그림자 흐르고 竹戰輕風動綠陰(죽전경풍동록음) 산들바람 대(竹) 흔들자 녹음 이움직인다 太守息煩長岸혔 (태수식번장안책)태수번뇌식히려두건을젖혀 쓰고 淸宵靜晝獨鳴琴(청소정주독명금) 맑은 밤 고요한 낮 거문고를 타노라 처음에 용담의 맑은 물에 우뚝한 봉우리가 비치고,안개에 싸인 고목이 신비로운 기운을 드러낸다고 하여 자연의 청정함과 고아 한 분위기를 묘사한다.다음으로는 정자 건립의 의의이다.정자가 들어섬으로써 자연의 경치가 한층 더 드러나고,주변숲보다 빼어 나게되었다는점,단순한건조물이아니라,경관을완성하는문화 적장치로본것이다.5븡6구에서는달빛과물,금빛과물결,바람과 흔들림,대숲과그늘등음영과움직임을섬세하게표현하였다.경 물이 단순한 풍경에서 시인의 정서를 어루만지는 대상으로 바뀐 다.마지막으로자아와수양위희구,벼슬살이의번뇌를달래고선 비의마음을맑히는경지로나아간다.조사수(趙士秀)는봉선대부 소부소윤(少府少尹) 조문형의 아들이다. 1377년(고려 우왕 3년) 진사시에 입격했다. 1404(태종 4)년에 우헌납를 지냈다는 기록이 븮태종실록븯에나온다.창평이나광주인근에서국당과만난듯하다. 차운하다[헌납조사수]次韻[獻納趙士秀] 瑞石山高朝衆岑(서석산고 조중잠)서석산높아서뭇봉우 리조회하고 應山心水作潭深(응산심수 작담심) 산속 맑은 물 깊은 못 을이루었다 亭前勝景供詩眼(정전승경 공시안) 정자 앞 빼어난 경치 시안을열어주고 潭上奇散抱竹林(담상기암 포죽림) 못 위의 기암괴석, 죽 림을감싸안네 岳氣川聲互今古(악기천성 호금고)산기운냇물소리고금에변함없고 雲容雨態易晴陰(운용우태역청음)구름과비의모습개었다가흐 려진다 使民無訟日來此(사민무송일래차)백성송사없다면날마다여기 와서 豈獨當時子賤琴(기독당시자천금)어찌그대거문고에시대를맡 기지않으리? 박희중(1364~1446)은 첫 이름은 희종(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본관은 진원(珍原)이다. 1401년(태종 1) 증광문 과에급제,1406년군자감전라도경차관,세자부좌정자,1407년이 조정랑, 1410년 점마별감, 1415년 전라도경차관으로 관찰사 박습 (朴習)등과김제벽골제수축.1416년예문관지제교겸춘추관기 주관, 1421(세종 3)년에 영암군수, 1422(세종 4)년에 일본 회례사, 1423(세종 5)년 직제학 등을 지냈다. 『해동필원(海東筆苑)』에 이 름이오른명필이었다. 차운하다[제학박희중]次韻[提學朴熙中] 巖揷澄潭屹作岑(암삽징담흘작잠)맑은못에바위를꽂아우뚝한 봉우리되고 岑顚畵閣控高深(잠전화각공고심) 산봉우리, 그림 누각 비치니 높고도깊어 欲開客逕營危띨 (욕개객경영위등) 비탈진 돌길 만들어 객 올 길 열고자 擬出他山클 茂林(의출타산전무림) 울창한 숲 깎으니 딴 산을 만 든 듯 月到彼心涵萬象(월도피심함만상)달빛은물결에비쳐온갖물상 이잠겼고 風來樹角散層陰(풍래수각산층음) 나무 끝에 바람 부니 겹겹 그 늘흩어진다 祗將二樂期鍾子(지장이악기종자)어찌마침이요의종자기를만 났던가? 徒倚欄干獨撫琴(도의란간독무금)그저난간에기대어홀로거문 고를뜯노라 세 사람의 시는 같은 경관을배경으로하지만, 박흥생의 원운은 “자연 속 자기 수양”이라는 자 기서정의측면이드러난 다. 조사수의 차운은 “자 연-정치의 합일”이라는 공적 서정이 돋보이고, 박희중의 차운은 “자연 속 지기(知己)갈망과 고 독”이라는 교유적·인간 적 서정을 보여준다. 용 담정이라는 공간은 자연 을매개로선비의심성과 세계관을 투영하는 마당이 되었고, 세 시를 함께 놓고 보면 청정· 찬미·고독이라는서로다른정조가입체적으로드러난다. 이후 고경명이 드나들며 시를 남긴다.그리고 학봉 고인후가 시 호를 받고 연시례(延諡禮)를 하게 되는데, 종가가 용담대에 있다 는 기록이 븮제하휘록븯에 있다. 이후 1927년에 소산정이 들어선다. 그연원을차례로보자면,①강호문용담대-②섬돌승사(僧舍)-③ 대나무들보초가정자-④박흥생현령중수용담정[이요정]-⑤제 봉 고경명과 환학 조여심의 용담대-⑥학봉 고인후 종가와 연시례 -⑦동호당 조은환 소산정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한 용담대-용담 정의역사성과장소성은장기지속성을이어오고있다. 특히창평현령박흥생의용담정중수기록을통해알수있는용 담정은 담양 정자 문화의 기원을 15세기 초반으로 소급하게 한다. 이는 정자 문화가 16세기 면앙정이나 식영정 등으로부터 비롯된 다는일반인식을보완해줄또다른기록으로여겨진다. /참고문헌-박흥생븡박흥거저,박기용역,븮국역국당유고·이요당유고븯,도서 출판월인,2018.한국정신문화연구원,븮국역제봉전서븯,1980. 글쓴이김희태(전전라남도문화재전문위원) ※본자료는재단법인호남학연구소에서메일링서비스로받은 글입니다. 한국학호남진흥원(韓國學湖南振興院)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소촌동에있는한국학전문진흥기관입으로호남권(광주· 전남·전북 일부지역)의한국학자료를 수집·보존·연구·보급하고 한국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과 차세대 전문인력 양성에 기여하 기위한기관이다. 2017년설립,2018년공식개원했다. 뱚호남학산책-문화유산기록과현장 창평용담대용담정과창평현령박흥 생 창평현령 박흥생의 븮용담정중신서 븯(븮국당유고븯) 1362년과거급제한강호문과용담대 용담대옛터일원수경관과 산경관.묘소부근잔등마루에소산정이 있다. 기암괴석이솟고맑은연못이있는,용담대 15세기초반용담정을넘나든문사들 용담정옛터(현소산정)에서조망되는무등산 박흥생의 븮제용담정중수븯와 조사수, 박희중의차운 소산정(小山亭, 篠山亭) - 이곳 일대는 고 려말기의 강호문과 용담대-조선초기의 청 평현령박흥생과 용담정으로 그 연원이 이 어져오는문화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