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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12월31일 수요일 6 (제228호) 기 획 영동공의 후예들은 매곡면 내동을 중심으로 유전리, 어촌리, 노천리 등 600여년 세거지를 지키며 지역의 토반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다. 영동공의 휘는 원직으로 사헌부 감찰과 사 복시 주부를 거쳐 영동현감으로 영동에 출사(出仕)하여 크게 치 적 이 있어 그 사 적이 영동 읍지 에 실 려 있 으며 , 영동 에 최 초로 입 향하게되었다. 아버지청간재(廳澗齋)휘 효함(孝誠)은 성품이청렴 강직하여 처음 근위병(近衛兵)으로 명성을 날렸고, 해풍 고을 관장함에 정 사를 모두 으뜸으로 펼치고,녹봉(祿俸)외에는 취하지 않으니 청 백함이 명성을 떨쳤다.특히 세종 경술년(1430) 가을 보령에 해구 (海寇)가 침입하여 걱정거리임에도 적임자가 없었으나 청백함으 로 선발되어 부임즉시 순찰사 최윤덕과 감사 박안신(밀양인 규정 공后)으로더불어성동쪽일리(一里)지점당산(唐山)남쪽을살 펴면밀한계획으로몇달되지않아축성을마치니백성이별로힘 들이지 않고 도적이 자취를 감췄다.얼마 되지 않아 첨추(僉樞)가 되었고 또 얼마 후 나아가서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가 되었다.아들원직(原直)과원창(原昌)을두었으며강릉공파의파 조이기도하다. 영동공(휘원직)이현감으로재임시당시행정구역은영동군과 황간군으로나누어져,황간(현매곡면)으로최초입향은영동공의 넷째아들휘지(址)이며관조로부터14세로장사랑을역임하였다. 장사랑공은단종2년甲戌3월5일에출생하였으며,공이어릴때 부터 효우가 돈독하고 정대한 의리와 명랑한 자태가 성인과 같아 일찍이 가정교훈을 잘 받아 학업을 조성했는데,12세에 친상을 당 하여 호곡 망극하였다. 복을 벗을 뒤에 맏형(휘 도)과 둘째 형(휘 인)은 제천으로 피화하고 셋째 형(휘 규)은 조졸하고 홀홀단신이 되었는데 이때 황간 내동에 거주하는 한성부(漢城府) 참군(參軍, 정7품)견계달(甄季達)이공(公)을맞아사위를삼으니이때장사 랑공은15세요세조13년(서기1468년)으로543년전이다. 견참군께서 그대 선장(先丈) 영동현감과는 일찍이 혼약(婚約) 이 있었다고 일러주면서 내동(內洞)에 거주케 하고 ‘나는 무남독 녀(無男獨女) 뿐인 즉 전장(田庄)을 물려주니 관리를 잘 하여라’ 고 하였다. 그때 중군장(中軍將)은 내동 장척(長尺) 일대의 넒은 농토를 소유하고 부호(富豪)였으므로 공은 관리와 재용(財用)의 절제와 경리를 조밀하게 잘하여 수년 후에는 살림이 넉넉하게 되 어춘궁기에는매년가난한 사람을위해서많은양곡을나누어 주 니원근주민들이송덕을아니하는사람이없었다고한다.그러나 불행하게도향년32세로조졸(早卒)하셨다. 부인 의인(宜人)황간 견씨와의 사이에 4형제를 낳았는데 장남 은안주목사(安州牧使)휘성량(成梁)이다.일찍이사마시에합격 하고24세에무과에올라선전관겸내승(宣傳官兼內乘)을제수하 였고 만기가 되어 26세에 충주판관에 이어 훈련원도정,종성부사, 안주목사에이르렀다.아들응덕(應德)은인의(引儀),응복(應福) 은학행이있었으나후사가없다. 후손들은목사공(휘성량)을기리기위해1632년봉유재를건립 하였다.봉유재는이후두차례에걸친중수과정을거쳤다.흥학당 인접한 곳에 건립되어 소종재라 불리다가 봉유재(奉裕齋,선조를 받들고후손에복을준다는奉先裕后라는뜻)라는현판을달고서 당으로 사용하였다.본 건물은 1632년 초축 후 1751년과 1931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2019년 해체보수과정 확인된 상량문에 의하면 1821년에도 중수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2000년 지붕을 보 수하였고, 2002년에는 삼문과 담장을 정비하고,2009년 배면 담장 을보수하였다.이후2019년 관계전문가 자문 하에 전체 해체 보수 하여 부식된 부재를 교체하고 기단을 전통양식으로 복원하였다. 규모는 정면 4칸,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저연석 기단과 초석을사용하였으며,2019년해체보수과정에서확인한결과구들 은 지형적 특성을 고려 비스듬하게 시공되어 있었고,일부 목부재 의경우 다른건물 부재를재사용한흔적이 다수확인되었다충북 유형문화유산제402호로지정관리되고있다. 장사랑공의2남은휘성간(成杆)으로무후(无后)이다. 3남은 휘 성건(成楗)으로 영천부사를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 判)에증직되었으며7남2녀를두면서크게번성하였다. 장남은 통덕랑(通德郞) 휘 이봉(以鳳)이오, 2남은 휘 이룡(以 龍)인데 황이장군으로 임란의병장(黃義將)이다. 어릴 때에는 재 종조(再從祖)인 사암(思菴) 순(淳)에게 수학하였고 장성하여서 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 사사하였다. 1561년에 사마시(司 馬試)를거처1577년에문과에급제하여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이조좌랑(吏曹佐郞)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예조정랑(禮曹正 郞)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의 관직을 엮임 하였다. 1591년에 해서순찰사(海西巡察使)에 임명되어 재임 중에 군비(軍備)의 유 고(有故)로 1592년 3월에 원주(原州)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왜변 (倭變)을 당하게 되었다. 박이룡은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유배 지에서뜻을같이하는무사(武士)들을모아서전지(戰地)를향하 여남쪽으로내려왔다. 전쟁에서교전한회수는무려2백여회에이른다.1593년10월에 는 능성현령(陵城縣令)에 제수(除授)되었다. 의병들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키고 성벽(城壁)을 수축하고 빈민을 구제하고 동통(疼 痛)을참아가면서적과싸워서여러가지기공(奇功)을세웠다.15 95년 1월에는 군자감정군(軍資監正)에 제수(除授)되었다. 능성 (陵城)에서 재임 중에 지난달 부상고개(扶桑峴)전투에서 화살을 맞은 시독(矢毒)이 재발되어 1595년 4월 30일 임지 관아(官衙)에 서 향년 63세에 순직, 순조조(純祖朝)에 이르러 임란공신에 대한 포증은전(포贈恩典)이 있어 1812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 직(贈職)되었고 영동군 매곡면 내동(內洞)에 있는 세덕사(世德 祠)에향사(享祠)하였다. 3남 휘 이인(以麟)은 증직(贈職)으로 통정대부 중추부사에 올 랐으며, 4남 휘 이호(以虎)는 무후(无后), 5남은 휘 이운(以雲)이 고,6남 휘 응훈(應勳)은 효자로 정려가 내려졌다.특히 그의 효행 길에는호랑이도감응(感應)하여지켜주니호랑이무덤을짓고매 년시향을함께하고있고,세거지비또한노천효자길탐방로의시 점인효열비각과호랑이 상옆에 세워조부 장사랑공과 아버지소 촌공에이은3대효자가문임을드러냈다. 오촌공(휘응훈)은자라나자송당박영선생에게사숙(私淑)했 는데학문에독실하고행실을두터우며재예(才藝)가초월하여시 (詩)는성당(盛唐,중국당나라의문학사를그융성단계로보아,초 당,성당,중당,만당의네시기로나누었을때둘째의시기)을사모 하고글씨는종왕(鍾王,魏鍾 뮬 과 晋 王羲之)을 본받으며 그림에도 공부하여 사림들이 삼절(三絶)이라 일컬었다. 1601년(선조 34) 정 려(旌閭)를 받았으며,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에오르고,황간(黃澗)의송계서원(松溪書院)에배향되었다. 선생의 효행은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조선시대의 정치·사 회·문화를기사본말체로서술한역사서‘연려실기술’,충청도읍지 (1684,숙종10)등에기록되어전해진다. 7남이란(以鸞)은문행으로크게이름을떨쳤다. 이처럼충효(忠孝)를실천하며지역토반으로성장하는데는선 조들의 남다른 혜안이 있었다.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서당 봉유재와 흥학당을 세움으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봉 유재와 흥학당은 향사에 재실로도 사용하였다. 흥학당은 가문의 목사공(휘성량)등삼형제(휘성건,성권)가황간현감박영(1471 ~1540 號 松堂)에게 수학 할 때 선생의 지시로 지었고, 그후 영조, 숙종, 고종 때 중수한 건물로 우물 정(井)를 한 대청마루가 있고, 흥학당기와 중수기가 전해오고 있어 충북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관리되고있다.이밖에도세천재(歲薦齋)」는후손박세필(朴 世弼)이 1691년에 처음 지은 재실(齋室)로,그의 부친인 박지찬과 아들인 박수조까지 3대를 제향하는 공간이자 후손들의 강학을 위 한 공간이다. 광복 후에는 독립운동가 성하식(成夏植)이 훈장을 맡아교육을했고,초대부통령인이시영(李始榮)이시국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충청지역을 대표하는 재실건축의 전형성과 지역성을잘보존하고있어국가보물로지정관리되고있다. 이처럼황간(현매곡면)일대의후손들은지역의토반으로자리 하며 문풍과 학행을 선도하며세계를 이어가고 있어 금번 세운 세 거지비문을곁들여본다. 이 마을 내동(內洞, 안골) 은 충주박씨 영동공(永同 公) 휘(諱) 원직(原直)의 후손들이 세조 11년(1466) 이후 집성촌을 이루어 대대 로살아온터전이다. 충주박씨는 신라 시조 박 혁거세(朴赫居世)를 시조 로 하고,고려 시대 부정(副 正)을 지낸 박영(朴英)을 관조(貫祖)로 한다. 9세 참 의공(參議公) 박진(朴풂 ) 은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 察), 병조 참의(兵曹 參議) 등을역임하였다. 그의 장남 효함(孝 )【자 록(錄), 청백리(淸白吏), 첨추(僉樞), 행강릉대도호부사(行江陵大都護府使),가선대부(嘉善大夫)】의 장 남이신원직(原直)선조께서560여년전이곳에정착하여후손들 이세거(世居)하게되었다. 영동공원직께서는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거쳐,영동현감 (永同縣監)과 사헌부 감찰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고, 그 치적은 븮영동읍지(永同邑誌)븯에수록되어있다.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도( 떳 )는 지례감무(知禮監務), 용안감무(龍安監務), 안주목사(安州牧使)를,차자 인( 쵸 )은 무과 (武科)급제,정3품어모장군(正三品禦侮將軍),행충무위부사직 (行忠武衛副司直)을,삼자 규(圭)는 사헌부 감찰을,넷째 지(址) 는장사랑(將仕郞)을지냈다.영동공께서는세조11년(1466)5월9 일별세하였고,삼년상을마친세아들은각자의임지로떠났으나, 당시 15세였던 막내 지(址) 선조께서는 모친과 함께 영동에 남았 다. 이후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견계달(甄季達)의 외동딸과 14 68년에 혼인하여 이곳에 세거하며 자손을 번창하게 하였다. 장사 랑공 지(址)선조는 32세에 별세하였으나 슬하에 4형제를 두었으 며, 당시 영동군수(永同郡守)였던 송당 박영(松堂 朴英)의 지도 아래모두과거에급제하였다.장자성량(成樑)은훈련원도정(訓 鍊院 都正),안주목사(安州牧使)를,차자 성간(成杆)은 일찍 별세 하여 후손이 없고, 삼자 성건(成楗)은 옥천군수(沃川郡守), 영천 부사(榮川府使), 청주목사(淸州牧使),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 을,넷째 성권(成權)은 초시(初試)합격 후 성균관생원이 되었다. 그 뒤로도 후손 중에 문과(文科)·무과(武科) 급제자들이 연이어 배출되었으며,특히 증손자 학촌 이룡(鶴村以龍)선조는 문과 장 원으로,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해 서순찰사(海西巡察使)등을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시에는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200여 회 전투에 참여 하여 큰 공을 세우고,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 軍資監正)에 제수되었다.후손중에는효자박응훈(朴應勳)선조(先祖)처럼정 려(旌閭)를 받은 이도 있으며,이후에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명 문가로자리매김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충북 매곡(梅谷), 황간(黃澗), 용산(龍山), 추풍 령(秋風嶺), 모서(牟西), 화령(和寧), 제천(堤川)과 경북 김천시 대항면(代項面),봉산면(鳳山面,1914년까지황간현소속)일대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국가보물 세천재(歲薦齋), 도 지정 문화재 흥학당(興學堂), 사로당(四老堂), 황의사(黃義祠), 재실(齋室,7),사당(祠堂,2),학당(學堂,2),서당(書堂,1),정려문 (旌閭門,1),신도비(神道碑,1),비각(碑閣,2),시묘소(侍墓所,1), 호총(虎塚,1)등유적이다수남아있다.이에이명문가의뿌리를 기리고후손들에게그연원을알리기위해,강릉공종중(江陵公宗 中)의후원을받아영동공종중(永同公宗中)에서비를세운다. 신라시조왕혁거세사벌군후손충주박씨분관조고려부정공휘 영의 구세(新羅 始祖王赫居世 沙伐君後孫 忠州朴氏 分貫祖 高麗 副正公諱英의九世) 참의공파 진 선조님의 장자 강릉공파 효함의 장자 영동공 원직 종중(參議公派 풂 先祖님의 長子 江陵公派 孝 의 長子 永同公 原直 宗中)-고문(顧問) : 재원(在源), 철기(鐵基) / 회장 우숙(愚 淑), 공사원 희진(熙振), 총무유사 종덕(鍾德)/ 이사(理事) : 일수 (日秀), 중근(重根), 석호(錫浩), 용선(鎔善), 석진(錫珍), 우양(愚 陽)/종복(鍾福),우영(愚永),우정(愚正),용규(容奎),병주(炳柱), 우봉(愚鳳)/감사(監事):기원(基源),봉기(俸基)외종원일동 뱚집성촌을찾아서 충주박씨영동공후손영동군매곡 면내동마을 충북 영동군매곡면내동마을전경 충주박씨는우리나라에서현존하는족보중제일오래 된족보(성화갑오1474)를갖고있는것으로도유명하 다.지금까지우리가알고있는족보는안동권씨의족 보(성화보 1476년 발행)라고 알고 있으나 충주박씨족 보는이보다2년이앞선다. 조선조 밀성(밀양), 반남에 이어 대제학(大提學)을 비 롯하여 재상(宰相), 청백리(淸白吏)를 많이 탄생시킨 충주박씨는대전을중심으로하여영동,광주,장수,상 주등으로세거지를확장하며명문가로서의기반을닦 았다.또한그중심에는강릉공의두아들원직과원창 의후예가있다.지난16일과17일세거지비를건립후 손들에게삶의지표(指標)를세우며종중을더욱번성 하게하고있어장남원직의후예세거지인매곡면일 대와 차남 원창의후예 세거지인 논산 가야곡면 삼전 리를소개해본다. 충북영동군매곡면내동마을 노천효자길탐방로의시점인효열비각과 호랑이 상옆에세워진세거지비 세거지비 제막식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60여 종친이 기쁨을 함께나 누고있다. 충주박씨영동공휘원직세거지비 (忠州朴氏永同公諱原直世居之碑) 영동공세거지비 충남논산시가야곡면삼전리전경 ▶7면으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