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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9월30일 화요일 6 (제225호) 특 집 행산공의휘는세균(世均,밀성대군의14세(世)이고태사공의7 세(世)이다.1340년경에 고려 충혜왕 때 양효공(良孝公)간(幹)의 차차(次子)로서은산부원군휘영균의제(弟)로태어났다.벼슬이 고려조의 보문각 태학사이며 전문형(典文衡)과 중국 元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지냈다. 노년에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원나라 문관 구양현이 이별을 슬 퍼하며지은시(詩)븮송고려박학사븯는지금도전해지고있다.귀국 하여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에 봉하고 시호(諡號)를 충정(忠靖)이라 별세 후에 받았다. 또한 수연(壽宴)을 맞으니 임금께서 기로치사(耆老致仕)와 함께 선 (膳:궁중요리)과 악서(樂書)와 광효(廣孝)라는 두 글자를 내리시 어고향에서도임금의극진한대우속에만년(晩年)을보내셨다. 충정공 행산 선생의 많은 문적들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에 잃 고 남은 시문들마저 천지개벽과 같은 수해에 모두 실전하였으니 애통하지않을수없다. 중국(元)의 명사(名士)인 구양현(歐陽玄)이 해외(海外)의 의 발(衣鉢)이라는시(時)로서公의문장(文章)을염모(艶慕:화려하 여높이사모함)하였다. 행산공은 슬하에 도은공(挑隱公) 휘 문빈(文彬), 소감공(少監 公)휘문익(文翊)형제를두었다. 장자의 문빈(文彬)은 중서전(中書典) 문형 (文衡)이 벼슬이다. 고려가 운이 다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망복지절을 고수했다. 이조 에서 대사성으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98세로 졸하니 좌찬성 의금부 세자좌빈객을 증하여 문절(文節)이라 사시(별세 후 시호 (詩號)를 받음)했다. 公은 포은(정몽주), 목은(이색)등의 문인들 과교류하였으며목은선생의시중(詩中)에도있듯이부자(父子) 세분이 학문이 깊었기에 가전삼학사(家傳三學士)라 칭하였던 구 절이있다.도은선생께서이곳밀양부북면송악에오시어칠순을 맞으시니 임금께서 광효규모(廣孝規模)라는 글을 하사하시니 임 금과 나라의 후대를 받으시고 일세의 문장이신 목은 선생의 축하 시등많은시를주고받았다. 차자의 휘(諱)는 문익(文翊) 이다. 고려시대의 소감의 벼슬은 무관직으로 기병과 보병을 합친 군대를 인솔하여 전라도 전주지 방에 주둔한 것으로 추정된다. 형인 도은공과 더불어 망복지의를 지켜이조에는벼슬을하지않고충절을다하였다. 목은 선생의 시문에 杏山先生,도은공(挑隱公)소감공(少監公) 삼부자를 삼현이라 하였으니, 또한 벼슬을 하였더라도 상당한 학 문의 깊은 곳에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소감공께서 전라도에 주둔 하고 계실 무렵의 역사는 포은(정몽주)의 계열로써 함께 뜻을 하 신것으로짐작할수있는것은삼부자모두가함께이조개국에참 여하지않았고,그후정변으로삼부자의묘소마저도실전되고,또 손자(6분)모두도피신하여심산유곡에은둔하였음을5대손四美 (사미)공의묘소와기록을통해서도알수있다. 화산(花山)권용현(權龍鉉)선생의기록에“유염(孺染)하여정 매(征邁)하니덕(德)을이루었다”하였으니행산조(杏山祖)의높 은뜻과도은공(挑隱公)의학덕(學德)을이어받아서삼현학사(三 賢學士)댁(宅)이라하였으리라. 행산문중은크게6소파로분파되어세계를이룬다.즉도은공의 아들 4형제 신열(臣悅), 신경(臣敬), 신보(臣輔), 신총(臣寵))과 소감공의아들형제신좌(臣佐),신필(臣弼)이다. 찬성사공파파조는도은공의장자신열(臣悅)이다.공은어려서 부터깨달음이빨라일찍이생원시에오르고문장과기절(氣節)이 뛰어나 세상이 이름을 떨칠 만 하였으나 아버지 도은공이 불사이 군(不事二君)의 충정(忠貞)으로 모든 관직을 불사(不仕)하고 고 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니 공(公) 또한 출사(出仕)의 뜻을 접고 아 버지가 불편함이 없도록 극진히 효 성을 다하였고, 찬성사(贊成事)에 증직되었다. 아들 진사공의 휘(諱) 는 시거(時擧)이고 진사(進士)에 오르고 학문과 덕행절의(德行節 義)널리 알려진 학자이고,손자 감 찰공의 휘는 종기(宗技)이며, 홍문 관 정자와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슬하에 명달(明達),형달(亨達),영 달(英達)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명달은 무후이고 차자 형달(亨達) 의 자(字)는 통중(通仲), 호(號)는 사미(四美)이다. 사마시에 합격하 여 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一 亮 鄭汝昌), 오졸재 박한주(迂拙齋 朴漢柱) 선생 등과 막역한 교분을 맺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학문과 행의(行誼)로서 천거되어 통례문(通禮門) 인의(引儀)에 제수되 고,또 명경(明經)으로서 봉교(奉敎)와 홍교(弘敎)에 제수되었으 나나아가지않았으나얼마되지않아무오사화(戊午士禍)가일어 나사람들이그선견에탄복하였다. 사미공의아우영달(英達,감찰공의차자)은군수(郡守)를지냈 다. 사미공(휘형달)은아들숙지(叔 폴 ),숙근(叔根),언계(彦桂)당 삼형제를 두었다. 장자 숙지는 진사이다. 학문이 뛰어나 도신(道 臣)의천거가있었고,문학과행의가사림의표상이되어현풍향안 에 올랐다. 아들 천수(千壽)는 전력부위(展力副衛), 손자 유(瑜)의 자(字) 는국보(國寶),호는응천자(凝川子)이다.1549년에태어나1570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대암 박성(밀직부원군 后) 등 명현들과 교유 하였으며, 망우당 곽재우와도 도의지교로 사귀었고, 1585년 망우 당과함께전시에나아가과제와다르게서술하였으나두분다높 은성적으로급제하였다.왕명에의해그방을없애고특별히춘추 한질을 하사하며 선생의 기백과 절의를 장려했다. 뒤에 조정에서 부르는 명이있었으나나아가지 않고자연을벗삼아한가히 노닐 면서 위기지학을 더욱 궁구하였다.습정 송방조는 공의 뛰어난 학 문을 찬양하며 아들인 충현공 송시영을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게 하였으니 절의 또한 임금에게 권장 받았고,스승과 벗에게도 존중 되었으니많은사람들이제자가되길원했다. 사미공의차남숙근(叔根)은문과로현감을지냈고문장과절의 가뛰어나현풍향선생안에올랐다. 사미공의 삼남언계(彦桂)의자는형백(馨伯)으로진사시에오 르고 학문과 덕행으로 곤양제독에 천거되었다. 오졸재 선생의 제 자이고 정암 조광조와는 서로 절친했다. 아들 대성(大成)의 호는 안국암(安國巖)으로회재이언적을따라놀았으니선생이공에게 보낸 시에의하면 ‘산골짜기 맑은경치가한량없는데또구월하늘 은단풍철을맞았도다누가 길가는사람을 벼랑끊어진위로 불러 한항아리술과 더불어경치를감상토록 머물게하리’라는글귀였 다. 남명 조식, 삼족당 김대유 등 당대의 거유들과는 절친했다. 아 들 항(恒),신(愼),율(慄)삼형제를 두었는데 셋째 율(慄)은 무후 이다. 안국암공의 장자 항(恒)의 호는 성재(惺齋), 아버지를 섬김 에정성을다하였고,일찍이과거공부를폐하고,여러어진이와더 불어 사귀었다.항상 맑은 심성을 다듬었고 마음을 깨우치는 글을 방안벽에걸어두고심성을수양하는공부에힘썼다.학문과행위 로천거되어호조참의에제수되었다. 성재공의 아들양춘(陽春)의호는모헌(慕軒)으로학문을좋아 하여 정성을 다하고 부모를 섬김에 지극하였다.임진왜란 때 빈소 (殯所,草殯)에 엎드려 소리 내어 슬피 우니 왜장도 감동하여 물러 갔다.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정려문이 세워졌고, 모헌공 종중으로 세계를잇고있다. 모헌공의 장자 여( 聆 )의 호는 현석(玄石),종숙 국담 선생 문하 에서 사사(師事)했다. 효성과 우애가 두터웠으니 세상 사람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았다. 학행으로 한성부 참군에 천거되고 제수되 었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세상에서 현석처사(玄石處士)라 일컬었 다.종숙국담과아우오( 性 )와더불어선조밀성대군의유지인영 남루에제사를거행했다. 밀성박씨행산공파 뱚파조별약사 행산재전경,경남밀양시부북면송학길20,후원에행산공삼부자제단이 있고,좌측 관리사앞에행산재수호에기여한 후손들의 헌성비와유래비등이 있다. 행산공파(杏山公派)파조는 우리 박씨의 적장자(嫡長 子)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 휘 영균)의 동생이다. 아 들형제를두었고,그형제에서다시6지파로분파되어 각각 세계를 이루면서 크게 번성한다.그리고 밀양에 서경남고성,경북고령,전북정읍,전주,강원평창등 에큰집성촌을두고있어소개해본다. 행산공파연원 양친(兩親)을효성(孝誠)으로봉양(奉養)하였고,기수(耆壽)에이르 러 수연(壽宴)을 베푸는 자리에서 상(上 恭愍王)이 선물(膳物)을 반 사(頒賜)하고 악(樂)을 하사(下賜)하였으며,또한 광효규모(廣孝規 模)라는글자를써서하사(賜)하였다. 행산공파세계(世系) 행산재후원의단소왼쪽부터행산공,도은공소감공순이다. 찬성사공 삼부자 제단(左)과 국담 박수춘 선생의 여포비(右), 경남 밀양시 부북면후사포리 찬성사공제단 뱚▶7면으로계속 보강재-모헌선생재사(齋舍):경북 청도군각남면흑석리 뱚△찬성사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