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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1월31일 금요일 6 (제217호) 기 획 부조묘(不 튐 廟)는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분의 위패를 매혼(埋 魂)하지 않고 영원히 제향을 모시도록 조정에서 명하는(不 튐 之 典)것으로박유선생은1627년정묘호란때자진출전하여평안도 안주(安州)에서 적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순국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충절은세상에드러나지 않고있다영조때 경상도 관찰사 를 통해 알려져 ‘절사(節士)’ 시호를 받고 고종 때 부조지전(不 튐 之典)이내려져1867년후손들에의해세워지고지금에이른다. 이에 을사년을 맞은 새해 선생의 충의정신을 신유한(申維翰:16 81~1752)이 지은 박절사전(朴節士傳)을 통해 알아보고 부조묘의 성격과기능,연원,절사공파종중을함께소개해본다. 부조묘는 조선 시대의 신위를 옮기지 않도록 허락받은 신주를 모시는사당이다.예부터종갓집에서는제사를지낼때위로4대에 해당하는 선조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문제는 제사를 모 시던 자가 죽은 경우인데,죽은 후 그 후손은 뒤를 이어 제사를 모 실때죽은이를포함하여선조3대를모시게된다.이때기존에모 시던 가장 위의 선대의 제사는 지내지 않게 되고,이 경우 그 선조 의신위를사당에서꺼내땅에묻는것이예의이다.하지만특별한 경우왕의허락아래신위와제사를모시게되는경우도있었는데, 이것을부조묘라한다.주로나라에큰공훈이있는사람이나,위험 에빠진나라를구하기위해목숨을바친사람들이이경우에속한 다.왕들은나라에큰공훈을세운인물이라여겨지면신위를옮기 지 않도록 허락하였다.이렇게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 대상들 은 4대 봉사가 끝난 후에도 신주를 땅에 묻지 않으며 계속적으로 후손들에게기제사를받게되었던것이다. ▲연원:부조묘가처음어떻게생기게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 한나라 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부조 묘가 처음등장하게된것은 고구려 중엽이후 사당이건립되면서 부터이다.처음에는 불천위가 된 신주는 묘 밑에 설치하도록 하였 으나 후손들이 종가 근처에 신위를 위한 사당을 지으면서 부조묘 형태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부조묘는 이렇듯 국가의 공인을 받 았으나 후대로 오면서 지방 유림에 의해 세워지는 경우가 발생하 였다. ▲기능: 부조묘는 서원·사우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즉 서원 과사우가교육적측면과함께여러가지기능을수행하고있다면, 부조묘는 선조의 추숭 활동에 치중을 두고 있으며 왕의 직접적인 허락을 받고 건립된다는 점이 다르다.그러나 부조묘는 조선 중기 와 후기로 넘어가면서 서원이나 사우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서원이나 사우를 건립하여 향촌 사회에서 의세력을굳건히하려는사림의움직임으로볼수있으며,또한서 원이점점문중서원으로변화하는것과같은맥락이라고볼수있 을것이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금계사[錦溪祠]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곡4길 27-4 금곡리513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산 외면금곡리본촌에있는밀양 박씨절사공파종중의조선후 기 사당 ▲개설: 금계사(錦溪祠)는 박유(1576~1627) 선생의 충혼 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 때인 1 867년 후손들이 박유선생의 후손 집성촌인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본촌 마을(안쪽의 개천 동쪽) 산기슭에 건립한 부조묘(不 튐 廟)이다. 금계사 봉안문 은 김해부사를 지낸 성재 허전(1797~1886)이 지었다.박유 선생은 산외면죽원(竹院)에서태어나학문은동향의오한( 졀 漢)손기양 (孫起陽)에게 배우고, 궁술은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에 게 배웠다.정유재란 때 일본 대마도에 잡혀가 오사카(大阪)로 옮 겼다가 1605년 사명대사와 함께 환국하였고, 이후 무과 등제하여 봉사(奉事)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자진 출전하여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적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순국하였다. 영조 때 경상도관찰사가 사연을 조정에 알려 ‘절사(節士)’시호를 받았고, 형조좌랑에 증직되었다. 산외 출신의 청천(靑泉)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 내용을 상세히 알려 널리 알려졌다. 박유의 14세손 박수창이 1934년 간행한 븮절사박공실기븯와 신유한(申維翰:1681~1 752)이지은박절사전(朴節士傳)이전한다. ▲위치:금계사는경상남도밀양시산외면금곡리513번지에 있 다.금곡리본촌마을회관뒤쪽의산비탈길을따라300m쯤올라가 면사당이있다. ▲변천: 금계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존속하였다. 금양 재(당시)기문은장인근(蔣仁根)이지었다.1961년전국각처에흩 어진선생의 후손들이 사당제향 때마다재계하며모일 곳이없자 재물을모아마을이름을딴재사를건립하였다. ▲형태:금계사는맞배지붕형태로정면3칸,측면1칸으로이루 어져 있다. 금계사 앞편에는 후손들이 1961년 치제소(致祭所)로 지은 금양재(錦陽齋)가 있다. 금양재는 팔작지붕 형태로, 정면 5 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양재와 금계사 사이에는 중문 이있고,금양재동쪽에는별도의곁채가있다. ▲의의와 평가: 금계사를 통하여 임진왜란의 전란상, 정묘호란 때밀양의대응양상과후인들의선양방식,밀성박씨의분포지등 을파악할수있다. ▲선원세계: 박유 선생의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대대로 밀양에서 세거해온 토호(土豪)이다. 파조 충 헌공(휘 척)은 고려조에 내부시승 (內附侍丞)에이르고순충동덕찬화 공신 삼중대광(純忠同德贊化功臣 三重大匡)에 밀성군(密城君)으로 봉(封)해졌으며, 추은(推恩)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은 총이 더하여지고 시호(諡號)는 충 헌(忠憲)이다. 사패지(賜牌旨)를하사받으니옛 밀주(密州)수산현(守山縣:현밀양 시하남읍)에 있으며 자손이 세세로 계승하여녹을받아왔다. 충헌공은 부인 아림군부인(鵝林 君夫人)경주이씨(慶州李氏)와의사이에아들성진(成進)을낳으 니 문과에 올라 조현대부(朝顯大夫)로 흥위위(興威衛) 정용장군 (精勇將軍)에 협찬공신(協贊功臣)으로 황증문하평리(皇贈門下 評理종2품)에이르렀다.특히고려충렬왕6년군사25,000명을거 느리고 왜적을 정벌 한 일은 고려사와 밀주구지에 기록되어 전해 진다. 손자 판전교시사의 휘는 원(原)으로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벼 슬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고 규의선력공신(揆儀宣力 功臣)으로 밀성군에 봉해지고, 슬하에 아들 윤겸(允謙), 윤문(允 文),윤무(允武)삼형제를두었다. 장남 윤겸(允謙)은 중랑장(中郞將)으로 아들(휘 連), 손자(휘 강)에 이르러 무후(无后)이고 차남 휘 윤문(允文)은 밀주의 풍각 화산(현청도군풍각면화산)본가에서출생하여충숙왕원년(131 4년)에 급제하여 삼중대광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 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충목왕 원년(1345년) 문사(文士) 38명을 선발하여 날짜를 바꾸어가며 시독(侍讀) 할 때 공(公)은 기거랑(起居郞,中書門下省에속한관직의하나.임금의일상생활 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등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 보는 종5품의 관료)으로서 주참(注 핫 )하여 저술(著述)하였고, 특히 문장이 뛰 어나 저술(著述)한 문적(文籍)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렸고,포은 정몽주,목은 이색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다.부인 해양군 부인 광산김씨는 첨의정승으로 치사(致仕)하고 시호(諡號)가 문 정(文正)인 태현(台鉉)의 따님이다. 부도를 수행하고 시부모(媤 父母)를섬기고형제간에우효(友孝)하고자손을골고루화애(和 愛)하고 자비심(慈悲心)이 노비(奴婢)에 까지 이르고 의복(衣 服),음식(飮食)에까지두루돌아가게하기를법도에맞게하니대 광공(大匡) 公은 호례군자(好禮君子)이고 부인(夫人) 또한 예절 (禮節)의 여자교훈(女子敎訓)으로 칭송받았다. 슬하에 아들 6명 을두니세칭육남대가라불러지며크게번성하였다. 삼남 윤무(允武)는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직제학에 이르렀으 나이또한손자대에이르러세계(世系)이어지지않았다. 대제학공 윤문(允文)은 밀양(密陽)·대양(大陽)·소양(昭陽)·삼 양(三陽)·계양(啓陽)·재양(載陽)등6형제를두었는데장남휘밀 양(密陽)의 호(號)는 낙촌(駱村)으로, 고려 충정왕(1349~1351)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법판서(典法判書)와 봉순대부(奉順大 夫)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하였고 밀산군(密山君)에 봉 해졌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선생과 교류하며 주고받은 시문 (時文)이전해진다.이분이절사공의11대조가된다. 판서공은경의(敬義),경지(敬智),경인(敬仁)삼형제를두었는 데장남경의(敬義)는고려충정왕때중랑장이되고공민왕때병 부참정으로 익대공신에 오르고 삼중대광 문하시중평장사에 추증 되었으며,시호는충민(忠敏)이다. 충민공의 아들 휘 득중(得中)은 고려 공민왕 때 삼중대광 문하 시중을 지내고 아들 분(賁),갱( 곧)을 두었는데 장남 분은 대호군 이고,차남갱은조선정종때승사랑문하사인을지내고정종의따 님인 함양옹주와 혼인하면서 부마(駙馬)로 밀영위(密寧尉)가 되 었으니곧8대조이다. 부마공의아들휘서창(徐昌)은문과에올라가정대부함길도관 찰사를 거쳐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467년 함길도 관찰사로서 이 시애의난(亂)에공을세워세조때정란공신에책훈(策勳)되었다. 관찰사공은 집(緝, 현령공)·경(經,직장공)·위(緯,봉사공)·유 (維,첨정공)·찬(纘, 주부공) 등 5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휘 집(緝) 은 음사(蔭仕, 선조의 음덕으로 받은 벼슬)로 양천현감을 지내다 문과에올라예조정랑에이어창원부사를지냈으니곧6대조이다. 현령공은 구령(龜齡)·학령(鶴齡) 형제분을 두었는데 차남 휘 학령(鶴齡)은오대조이다.세종11년(1429년에 태어나 경태6년 을 해(乙亥, 1455년, 단종3)에 사마시에 오르고, 1466년 익릉(翼陵,원 비인경왕후김씨)참봉이되었다. 참봉공 휘 학령(鶴齡)의 아들 휘 한(翰)은 일명 윤한(胤翰), 자 (字)는 괴부(魁夫)이다.중종 8년(1513)에 진사가 되고,1519년 별 시문과에 올라 벼슬이 춘추관 기주관,보성군수,나주목사에 오르 고,아들숭겸(崇謙)의字는락서(洛瑞)진사(進士),손자문전(文 銓)은 학생, 증손 희기(希夔)는 진사(進士)이니 곧 고조부, 증조 부,조부,아버지이다.절사공은아버지진사공(휘희기)과어머니 순천박씨와의 사이에서 선조 병자년(1576) 8월 8일에 밀주부(현 밀양시)동쪽산외면죽원리집에서태어났다. 선생은어려서특이한자질이있었고,자라면서기상이탁뢰(우 뚝함)하고용력(勇力)이남보다훨씬뛰어났다.나이17세때용사 (龍蛇,임진왜란)의난을당하자부친을모시고앵봉(鶯峯,산외면 다죽리뒤쪽의높은산)사이에서병란을피하며정성을다해봉양 하였다.산을나와쌀을지고가다가불행히도재침한왜적의노략 질을당해붙잡혔다.왜적두목이그모습을기특하게여겨감히해 치지 않고 장군으로 삼으려 배에 태워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갔 다.선생은 우울하게 지내다가 몰래 널빤지를 활용해 장차 바다에 뗏목으로 띄워 도망쳐 돌아오고자 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성취하 지 못했는데, 세 번이나 이처럼 하였다. 왜적의 두목이 칼을 손에 쥐고죽이려하자응대하기를,“사람의자식으로서부친의생사를 알지못한다면산들무엇하겠는가?살아서이미돌아가지못한다 면 죽어서 혼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다.” 하였다. 왜적이 말 하기를, “참으로 효자로다.” 하였다. 드디어 대판성(大坂城)으로 옮겨 가두고 엄하게 지켰다.이에 선생은 밤낮으로 비분해하며 이 역(異域)의귀신이되지않겠다고맹세하며,9년간그곳에머물며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임란이 끝나갈 즈음에 조정에서 사명 대사를일본에보내어포로가된남녀삼천여명을다싣고오니그 때 선생도 함께 했으니 나이가 서른 살이었다.고향에 돌아와 절도 사김태허(金太虛)에게배우니들어가서는독서하고나가서는활 을 연습하여 잠잘 때나 식사중이나 걸으면서도 입으로는 글을 외 우고손으로는활을연습하여풍우(風雨)와한서(寒暑)주야를쉬 지않으니사람들이혹광인(狂人)으로지목하면웃으면서대답하 기를“늦게배우는사람이일분의시간이라도아끼지않으면세월 이가는데어찌하겠는가뷻하더니얼마안있어서활쏘기를잘한다 는 명성이 있었다.1617년(광해군 9)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10년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사람들이 혹 벼슬을 권하면 번번이 말하기를, “나는 무신이고, 시절은 이미 평온하다. 지조를 굽히고 권세가에게아첨하면어찌부끄럽지않겠는가?”하였다.이는무인 (武人)으로서위급할때는나라를지키겠지만평화스러운때이니 나아가 녹을취하지 않겠다는 것으로대신 붓을잡아후학을 가르 치려는 선비정신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丁卯胡亂) 때에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함에 선생은 앞장서 관부 (官府)에가서국난에나아가기를자청하여이르기를,“국가에난 이 있으니 원컨대 군사 한 떼를 자원하고 오랑캐를 대적하겠다.” 하니 밀양부사 여우길(呂祐吉)이 그 말을 기특하게 여기고 그 태 도를 장하게 여겨 궁도와 솜옷 한 벌을 주었다.정월(正月)20일에 군사가 안주(安州)에 주둔하였다. 다음날 아침 먹기 전에 수많은 적들이 폭풍우처럼 갑자기 쳐들어와서 우리 군대는 대열을 이루 지못한채북을울려대니죽은자들이들을덮었으며,상장군이전 사하자 나머지 무리들도 궤멸 당하였다.박유 또한 휘하 병졸 8명 과함께호적과싸우다장렬히전사하였다.이때춘추가52세였다. 안주전투에서의 기록은 함께한 두 병졸의 증언으로 세상에 드러 났으니, 훗날 영조 때 경상도관찰사가 사연을 조정에 알려 ‘절사 (節士)’시호를받았고,형조좌랑에증직되었다. 뱚재/실/탐/방 박유선생의부조묘금계사(錦溪祠) 박유선생의부조묘금계사전경,경남밀양시산외면금곡리본촌마을 부조묘(不 튐 廟) 부조묘금계사 박유선생과금계사(錦溪祠) 금계사에모셔진위패 박유 선생의 선원 세계 절사공묘비 선생의생애 절사공파 재사 금양재 뱚▶7면으로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