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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12월31일 화요일 6 (제216호) 특집 화성구장마을 입 향은 학행으로 교관 에 천거되고 참봉에 제수된 휘 후(厚) 공 이 1518년 8월 7일 팔 탄면 구장리에서 태 어나 성장하여 세거 지를 구장리로 정했 기에 그를 입향조(立 鄕祖)로 한다. 입향 (立鄕)이라 함은 세 거지를정해종중을부흥시킨인물로추앙하면서입(入)대신입 (立)을사용하고있다.아버지휘의번(義蕃)公은황해도송화현 감을지냈다.당시중앙관직에있던관료들이서울근교에별거지 를 정해두고 관직에 등용되면 다시 서울로 갈 수 있도록 하고 있 어현감공께서도화성시매송면송나리에별거지를정해아들후 (厚)를 1518년 8월 구장리에서 낳아 양육하고,그후 그가 정한 세 거지구장리는500년세거지가되었다. 가학(家學)을 전념한 공은 영달을 멀리하면서 관직에 나아가 지않고후학양성에매진하면서종중의초석을깔았다하겠다. 입향조의선원세계를보면관조는밀성대군이고,중조는충헌 공으로 밀성대군의 13世 지손(支孫, 시조 42世孫)으로 고려조에 내부시승(內附侍丞)에 이르고 순충동덕찬화공신 삼중대광(純 忠同德贊化功臣三重大匡)에밀성군(密城君)으로봉(封)해졌으 며,추은(推恩)으로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은총이더하 여지고충헌(忠憲)의시호(諡號)를받아충헌공파파조이다. 증손에 이르러 대제학공 휘 윤문(允文)은 밀주의 풍각화산(현 청도군 풍각면 화산)본가에서 출생하여 충숙왕 원년(1314년)에 급제하여 삼중대광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고 밀성 군(密城君)에봉해졌다.충목왕원년(1345년)문사(文士)38명을 선발하여 날짜를 바꾸어가며 시독(侍讀) 할 때 공(公)은 기거랑 (起居郞, 中書門下省에 속한 관직의 하나.임금의 일상생활과 주 변에서일어나는일등을기록하는일을맡아보는종5품의관료) 으로서주참하여저술(著述)하였고,특히문장이뛰어나저술(著 述)한 문적(文籍)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렸고, 포은 정몽주, 목 은 이색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다.부인 해양군부인 광산 김씨는 첨의정승으로 치사(致仕)하고 시호(諡號)가 문정(文正) 인 태현(台鉉)의 따님이다. 부도를 수행하고 시부모(媤父母)를 섬기고형제간에우효(友孝)하고자손을골고루화애(和愛)하고 자비심(慈悲心)이 노비(奴婢)에 까지 이르고 의복(衣服), 음식 (飮食)에까지두루돌아가게하기를법도에맞게하니대광공(大 匡公) 은 호례군자(好禮君子)이고 부인(夫人) 또한 예절(禮節) 의여자교훈(女子敎訓)으로칭송받았다.슬하에아들6명을두니 세칭육남대가라불러지며크게번성하였다. 대제학공의 다섯째 휘 계양(啓陽)은 참찬공파의 파조이고, 입 향조의7대조가된다.참찬공의자(字)는계신(季信)이요일휘는 돈지(敦之) 초명은 계양(啓陽)이다.1342년 1월 6일(충혜왕4)송 도(개성)건천리사제(私第)에서태어나니천성이효성(孝誠)과 충신(忠信)으로가득하여어버이를봉양하고여묘(廬墓)를살면 서상제를극진히하였다. 1360년(공민왕10)에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이해 10월 25일에 책문으로서 신경동당(新京東堂) 병과(丙科) 5인에 급제하였다. 이 때 공(公)의 나이 19세이다. 고려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 夢周)는 이 날 을과(乙科)3인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 24세였 고. 목화씨로 유명한 고려 충신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도 병과(丙科)7인에 같이 급제하였는데 나이는 30세였다.1362년 5월문예부승(文睿府丞)을시작으로1411년(辛卯,태종11)8월정 헌대부(正憲大夫)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역 임했다. 평생동안말을빨리하거나성내는모습을보이지않았으며,역 대(歷代)와 전조(前朝)의 고사(故事)를 잘 알아서 인용했으며,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시편(詩篇)에 또 유명(有名)하고 옛 친구를잊지않았다.나이가많아벼슬을사양하고물러나려하자 친구들이모두불가하다고하니공이말하기를“나이팔순(八旬) 에이르렀으니선영에성묘를하고송백(松柏)옆에묻는것이내 소원이다.”하고는 결연히 남쪽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밀양 쌍계 서사에서돌아가셨다. 공은 외교에 더욱 빛이 났다. 명나라 사은사, 일본통신사로 가 는등가는곳마다큰족적을남겼다.정종실록1권,정종1년5월1 6일을유3번째기사에는븮통신관박돈지가일본과왜구근절책을 교섭하고 돌아오다.일본이 남녀 1백여 인을 돌려보내다븯라 적고 있으며,세종실록80권,세종20년2월19일계유2번째기사는븮일 본국 지도에 유의손의 지문을 적어 바치다븯에서 뷺예조에서 일본 국 지도(地圖)를 바치었다. 당초에 검교 참찬(檢校參贊) 박돈지 (朴敦之)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지도를 구해 가지고 돌아온 후에, 그 지도 끝에다 지문(誌文)을 적어서 예조 판서 허조에게 주므로, 조(稠)가 드디어 공인을 시켜 장황하여 바쳤던 것인데, 이때에 와서 예조에 명하여 그 지도를 본떠서 바치도록 하고,인 하여 응교 유의손(柳義孫)에게 지문을 쓰도록 명하였다. 박돈지 의지문은뷺건문(建文)3년봄에내가일본에사신으로갔다가비 주수(肥州守)원상조(源詳助)라는사람이그나라의명사라는것 을듣고,가서보고싶은뜻이있었는데,원이먼저와서보기를요 청하고 위로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인하여 그 나라의지도를보여주기를청했더니,원이이지도를내어주었는 데, 상세하게 갖추어져서 완연한 한 지경의 방여도(方輿圖)였으 나오직일기도(一岐島)와대마도두섬이빠졌으므로이제보충 하여 거듭 모사(模寫)하였다.뷻고 하였고,유의손의 지문은 뷺일본 씨족이바다가운데에나라를세웠으나,우리나라와는거리가동 떨어져서 그 나라 강역(疆域)의 자세한 것은 능히 알 수 없었다. 건문(建文)3년 봄에 검교 참찬의정부사 신박돈지(朴敦之)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그 나라 지도를 보기를 원하니,비주수 원 상조가 제집에 갈무리하였던 지도 한 벌을 내어 보였으나, 유독 대마와 일기 두 섬이 빠졌으므로, 돈지는 곧 보충하도록 한 다음 모사해 가지고 돌아왔다. 그후 영락 18년 경자에 예조 판서로 있 었던지금의판중추원사허조에게기증(寄贈)하니,허조는이지 도를 보고 고맙게 여기고, 다음 해 신축년에 드디어 공인을 시켜 장황하여바쳤는데,그그림이세밀하여서알아보기가쉽지않으 므로 선덕 10년 여름 5월에 임금이 예조에 명하여 도화원에서 고 쳐 모사하도록 하고,이어서 신에게 그 도본 밑에다 지문을 쓰도 록 명하셨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하에 지도란 것은 역대 로 중하게 여기던 것인데, 하물며 이웃 나라의 형세이리오. 지금 이 도본을 상고하니 비록 엉성한 듯하나,안으로 나라와 고을,밖 으로는여러섬을포치해놓은규모와구역)을대개가한폭의그 림 사이에 요연하여,직접 발로 밟고 눈으로 보기를 기다리지 않 고도다상고할수있으니,여기에서도오늘날왕화(王化)가미치 는곳은외방이없다는것을볼수있는바,이것을간수하여영원 한세대까지전하는것이마땅하다.뷻고하였다. 참찬공의 아들 휘 사제(思齊)는 판도총랑(정4품)으로 아들 둘 을 두었는데 장자는 인경(仁敬)으로 봉례랑이고, 차자 인효(仁 孝)는 조선시대 노비를 관장하는장례원의 사평(司評)으로 구장 문중의 문호가 열리는 비조이다. 아들(입향조 고조부) 시운(時 雲)은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를 지냈다.문장에 능하고 의리에 밝 아서 사람들의 문의공(文義公)이라 칭하였다. 혹은 문의(文義, 글의뜻)에밝은수령이라하여문의제(文義齊)라고도하였다. 입향조의 증조부 휘 영(寧)의 자는 희달, 호는 정재이다. 문과 에 급제하여 관직이 자헌대부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조부 중화 (仲華)는문과에정헌대부의정부좌찬성,호조판서에이르렀다. 입향조의아버지휘의번(義蕃)의자는경방,음사로진출하여 송화현감을 역임했다. 이처럼 대대로 관직(官職)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로 인해 대대로 도성(都城,한양)에 살았을 것으로 추 정된다. △서대문,고양시대 서대문시대의가장대표적인인물은참찬공(휘돈지)이다.134 2년 출생한 그는 1360년(공민왕 9년)에 진사시 일등과 문병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1374년(우왕 원년)에 홍균의 모함을 받 아관직을버리고인주(지금의인천)로귀양을가게된다.홍륜은 공민왕시해사건의주모자로추후거열형을받으며진실이밝혀 지며공의억울함을설원할수있게되었다. 복직한 공(公)은 1388년에 당시 46세의 나이로 이색(당시 60 세), 이방원(당시 21세), 이숭인(당시 41세) 등과 같이 하절사로 명나라에 입조(고려사 권137, 열전50)하여 외교관으로서 역량을 늘려나갔다. 고려말 이색이 금천으로 유배를 가자 공(公)은 생선을 선물했 는데그에대한감사의소회를읊은시가지금까지전해지는데다 음과같다.뷺오경에닭이울고비는쓸쓸히내리고/옛병과새시 름이다함께적요한때/생선과함께전해온서신을홀연히보았 나니/무료함위로해주려는고인의정이후하도다뷻 조선개국 이후 시를 잘 쓰고 글을 잘 쓰는 즉 문관으로서 역량 이 탁월하여 외교관으로서 외교의 최전선에서 맹활약했다.태조 6년일본국의도적방지와양국의화회를강구하고자회례사로갔 으며 정종 1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 왜구근절책을 성공적으로 교 섭하여 일본국 대장군(大將軍)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피로(被虜)되었던남녀1백여인을돌려보내는큰성과를 올렸다.명나라와의 외교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는데 태종때 노 송을 대신하여 명나라로 갔다. 태종의 10년 사행길은 그가 거둔 대표적인외교적성과이다. 참찬공의 아들 사제는 판도사 총랑, 그의 아들 인효는 장예원 사평으로은퇴후화성매송으로내려온것으로추측된다,참찬공 의후예중사평공(휘인효)으로부터화성구장문중이형성된것 이다. △매송면시대 사평공(휘 인효)의 아들인 문의제공(휘 시운)은 문장에 능하 고 의리에 능하였기에 별칭이 문의공, 역문의로 불렸다. 지방 행 정관리직인 목사를 맡았으며 지방직이었기에 본격적으로 매송 으로 내려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인효의 아들 휘 영과 그의 아들 중화는 각각 음직으로 자헌대부 공조판서와 정헌대부 의정부 좌 참찬을 맡았다. 매송면 시대의 마지막이라 볼수 있는 휘 의번은 음사로관계에진출하여송화현감을역임하였다. △구장리시대 매송면송라리에서구장리에입향한휘후(厚)공은지금의화 성구장문중을세운입향조(立鄕祖)이다. (박각준500년사편찬위원장) 구장문중은 후손 들이 숭조하는 정신 을 기리고 후손들의 친화하는 장으로 문 중의 긍지를 살리려 는애뜻한심정으로2 002년 사효재(思孝 齋)를건립했다. 파조인 참찬공(휘 돈지, 또는 계양)이 관직에있으면서매양부모를잊지못하는효성으로아버지가계 시는밀양으로낙향여생을보내면서후손들은선조의효심을잇 고 관리로서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본받으며 화성지역에서 거주 하는동안선조를모실수있는재실이없음을항상안타까워하다 2000년재실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계원)를구성하여통문을보 내고또는직접찾아다니며대역사를시작하였다. 참찬공의 아들 사제의 차남으로 사평을 지낸 휘 인효(시조48 세)를 비롯하여 시조 57세 휘 영 선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를 받들며추원보본의정성을다하고있다. 재실의재호(齋號)를사효재(思孝齋)라함은판도총랑을지낸 휘 사제(思齊) 공의 사(思)자를 취하고 사평을 지낸 휘 인효(仁 孝)공의효(孝)자를취해사효(思孝)라하였으며,백행의근본인 효(孝)는 만세불변(萬世不變)의 강상(綱常)임을 강조하여 숭조 사상을고양하기위한것이다. 삼문의 문호를 경애문(敬愛門)이라 함은 경장애친(敬長愛親) 에서취한것으로어른을공경하고부모를사랑하라는것으로자 자손손(子子孫孫) 세세토록 잇고 이어가기(세세승승,世世承承) 를기원하는종원모두의염원을표상하고있다. 구장문중은 지난 11월 10일 ‘밀성박씨 참찬공파 화성구장문중 입향조 500년사’를 펴내고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이번 출 판은 구장문중의 새 역사를 썼다 할것이다. 이 책은 화성 구장문중이 500년 동안 어떻게 유지, 계승해왔는지 를 기록한 것으로 조상을 그리워 하고 추모하는 후손의 도리이고, 후손들에게는 선조를 더 자세히 알고 자신의 뿌리를 알며 자긍심 을심어주기위한것이기도하다. 입향 500년이 되는 시점에 어떤 후손들이 살고 있는지 한사람도 빠짐없이 이름을 수록해서 후손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자신의 이 름을 찾아보기 쉽게 세대별 택호별로 정리해 자신이 시조로부터 혹은충헌공파나입향조의몇세손인지,어떤계통으로흘러왔는 지를알수있도록자손별로정리를하였기에무척이나의미있는 일이라할것이다. 편찬을 주도한 박각준 전 충헌공파대종회장은 구장문중의 영 광과발전이영원하기를기원하는사명감으로한 장 한 장 원고를 모았다고한다.그리고참찬공족보파보집을중심으로어려서부 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근거로 택호별로 분류하여 각자의 계보를 쉽게찾을수있도록편집했던것이이번편찬사업을추진하면서 가장 보람 있는 일로 기억된다. 편찬을 완료하기 까지 오랜 시간 이소요되었지만우리문중만의특별한자료를수록한것에감사 한마음이든다고술회(述懷)하고있다. 박각준 편찬위원장은 명지대를 졸업후 유한양행에 입사하여 소장으로 퇴직했다.남양향교 장의로 지역 유림발전에 기여해왔 고,현재성균관대대학원에서성리학을전공하며박사과정을준 비하는 만학도이다.충헌공파대종회 제34대 회장을 역임하는 동 안 특유의 친화력으로 종원들을 매료시켰으며,팔탄초등학교 90 회 졸업생 배출기념 ‘구장리 기름진 벌판에 우뚝선 닦음터’라는 화보집을 11대 총동창회장을 맡아 추진하였고, 개교 100주년 기 념식을주도하는등해박한지식을이책에쏟아부었다. ‘밀성박씨 참찬공파 화성구장문중 입향조 500년사’는 입향조 이전의 역사와 인물(시조왕등 신라 10왕,밀성대군,충헌공파 약 사 등), 입향조 이후의 역사와 인물, 근·현대 화성구장문중의 후 손 인명록 및 활동,대종회 활동과 후손들의 이야기,사진으로 보 는500년을보기쉽게나열하였으며,부록으로각종예절수칙,작 명례,성년례,축문용어해설등을담았다. 화성구장리 문중은 일찍이 자녀들의 교육을 통해 백년대계를 꿈꾸어 왔다.1921년 팔탄공립보통학교 설립에 참여하였고,서울 창신동의 건물을 매입 유학을 가는 자녀들이 기숙(寄宿)하도록 하였다.1982년에는 임야를 매각하여 수원에터를매입하여 신축 건물에유학한학생들에게무상으로사용할수있도록하는등그 육영사업은현재에도진행중으로선견지명(先見之明)의혜안을 발휘하면서수많은인재를양성교육계와행정,의료,경찰,법조 인으로각처에서종중을빛내고있다. 구장문중은 구장리 7 90번지에 대지 210㎡(6 3.5평)건평 95.11㎡(28.7 7평)의 종중회관을 건 립하고 지난 11월 11일 준공식을 가졌다. 90여 명의 종원이 6천7백 여 만원을 헌성하였듯 이 번 회관 준공은 지역의 토반으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종중원의 뜻이 반영되기도 하였다. 박각준 입향조 500년사 편찬위원장은 회관의 당호를 덕후관으로 명명한데는 입향조 후 (厚) 선조의 덕을 기리는 집으로 사자소학의 4번째 구절 恩高如 天(은고여천) 德厚似地(덕후사지)에서 취했다고 전한다. 이는 부모님의 은혜는 하늘처럼 높고,덕은 땅과 같이 두텁 다는 뜻으 로이는부모님을존경하고,그들의덕덕(德德)한행동을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이어 그는 지역주민을 위한 서당(書 堂)을 개설하여 청소년에게는 사자소학과 동몽선습을 성인들에 게는 경서(經書)를 강의하여 지역을 순화(純化)하고자 한다며 토반으로서역할을다하고싶다고말한다. 이처럼 화성 구장문중은 덕후관을 통해 종친들이 교육실과 역 사의 자료실로 사용하며 한편으로는 지역사회에서 도덕적 의무 를다해토반으로서의책임또한다할것으로기대해본다. 화성구장문중은 선조를 추모하고 그 근본에 보답하기 위해 대 대로체계적인종중관리를해왔다.1800년초 종손 휘용철(1810~ 1907) 공을 중심으로 협의체를 구성하여, 희원(1893~1943), 상욱 (1920-1974),상춘(1920~2006).태준(1928~2019)에 이어 흥준(193 8~현재)회장이취임하면서종친회의면모를일신하여회장체재 로지금에이른다. 이어 계원 회장은 사효재를 건립하여 종중을 크게 발전시켰으 며, 명준 회장은 참찬공파 세보를 발간, 평장묘원 조성으로 장묘 문화를 일신하고,제조장 3동 건립하여 수익창출에 기여했다.그 리고 현 주성 회장은 화성시 농업기술센터소장으로 퇴직 종사에 참여하며 박씨대종친회 경기도 본부 사무처장을 맡아 명준 회장 을 보좌하고, 2022년 제9대 회장으로 취임 종중회관 건립을 마무 리하였다. 대종회에서는 종중의 선영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선진지 견학 과 선조 유적탐방을 통해 종원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500년사를 발간 선조의 삶을 재조명하고 후손들에게는 자부심과 긍지를 심 어주고있어여타종중에귀감이되고있어찬사를보낸다. 화성구장문중입향500년사 구장리전경,1912년작성된지적도에의하면구장리일대대부분이토지가구장문중종원명의로되어있어그세(勢)를엿볼수있다 .느티나무를중심으로 그앞에종가가있고금년회관을신축하였으며,건너편에선조의제향을받드는사효재가있다.사효재옆에는박각준회장이운영 하는400평의넓은정원 을갖추고있는팔탄숲속요양원과주간보호센터가있다. 지난11월10일사효재제향후가진준공식과출판기념회에서종원들이함께하며지역토반으로서책임을다할것을다짐하고있다. 밀성박씨충헌공후화성구장문중의입향500년은 남다 르다.그동안본보에서는각문중의입향약사를정리하 여소개한바있다.입향과함께지역의토호세족으로자 리하는그과정은천차만별이다.구장마을안에는현재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있다.느티나무는 오백여 년간생존하며마을의수호신으로숭배해왔다.입향조 인 휘 후(厚)선조께서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느티나무 는오늘날까지문중의구심점의상징물이기도해그후 손들은높은수준의도덕적의무와책임을다하였을뿐 만아니라충효(忠孝)를실천함으로써지역민들의우상 이되었으니남양향교천금록에오른인물의숫자또한 수십명에달해이를뒷받침하고있다.그리고그로인해 매사행동거지를올바르게하면서선조를향한숭조정 신과종원간의따뜻한정을나누며후손들의교육에매 진해왔다.그리고그과정을한권의책으로발간후세들 에게교육의자료로남기면서또하나의획을그었다. 입향약사 지난11월10일사효재에서조상을숭배하고은 혜에보답하는마음으로제사를정성껏모시고 있다.(사진박각준축관의독축광경) 화성구장문중의입향에이르기까지 재사사효재를건립,추원보본의정성을 다하다 사효재전경,팔탄면구장리613-5 500년사발간으로새역사를쓰다 입향500년사출판을기념하는시루떡절단을하고있다. 박주성 회장(左)이 박각준 편찬 위원장에게 공로패를 전달하고 있다. 육영으로백년대계를이루다 종중회관개관,도덕적의무븡책임으로이어질것 참찬공파화성구장문중대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