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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2월28일 일요일 6 (제170호) 기 획 함양박씨 황산공파는 삼세효자로 불리우는 진사 휘 수화 (遂和) 공으로부터 문호가 열린다. 진사 휘 수화의 자(字)는 불류(不流) 호는 황산(黃山)이다. 이에 호를 따 황산공파라 세계를이룬다. 황산공의 상계를 보면 군기소감공의 아들 경( 궝)은 문과에 올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시학(侍學), 손자 홍저(洪貯) 는 전의령 판동부록사, 증손 검(儉)은 서운부정(書雲副正), 현손 득춘(得春)은 별좌(別坐), 득시(得時)는 사복경 홍문관 교리지제교를지냈다. 군기 소감공의 현손 휘 득춘은 경북 예천으로 이거해 갔고 차남 휘 득시는 문과 급제하여 중직대부(中直大夫) 사복경 (司僕卿)과 홍문관 교리(弘文館 敎理), 지제교(知製敎)를 역 임하였으며, 합천이씨와 결혼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황산 마을)에서아들휘선(鮮,동정공)을낳았으니바로광주전남 지역의 대성으로 번성한 동정공파의 파조로서 號는 유곡자 (柳谷子)이다. 동정공 휘 선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지제교 동정 (同正)을 역임하며 명성과 덕망이 세상에 크게 떨쳤다. 세종2 3년(1441년) 졸하였다. 슬하에 수지(遂智), 수화(遂和) 형제 를두면서크게번창하게되었다. 장남 휘 수지(遂智)의 字는 희안(喜安) 호가 지봉(芝峰)이 다. 세종3년(1421)에 출생하여 어머니를 지효(至孝)로 섬기 고제매(弟妹)를어루만져우애가지극했다. 차남으로 세종 기미년(1439년) 태어난 황산공은 세 살 때 부친(동정공 휘 선) 상(喪)을 당하여 능히 냄세나는 음식을 먹지 않고 애통하기를 성인(成人)과 같이 하였으며, 장성하 여는 학문에 독실하고 행동에 근신하며 모친(母親)에게 효도 가 극진하고 진사(進士)가 된 뒤에는 다시 벼슬하려고 않은 것은 모친을 봉양하는데 구애될까 두려움이었다. 그 뒤 모친 (母親)상(喪)을 당할 때는 공(公)또한 노쇠하여 집상(執喪) 하기가 어려운데 여묘(廬墓)하여 3년을 지냈다. 공(公)의 인 품이 강직하고 과감하며 가정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종족 (宗族)에게 화목하며 붕우(朋友)에게 신의가 있으니 모두가 효도한마음에서나온것이다. 성종 계축년(1493)에 서거하였으니 춘추는 55세요 부인 언 양김씨는 장사랑 백형(伯衡)의 따님으로 시어머니에게 효도 하고자녀(子女)를의(義)로써가르쳤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이관(以寬)은 보덕(輔德)이고,차 남이홍(以洪)은생원으로월영당공으로이들형제는각각보 덕공파,월영당공파로불린다. 보덕공파는 황산공의 장남으로 휘는 이관(以寬) 자는 자용 (子容),호는 보옹(빡翁)으로보옹공파로도불린다. 보옹공은 인품이 뛰어나고 천성이 인효(仁孝)하며, 학문이 일찍 발전되어 성종 계묘년(148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 자년(149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내직으로 사헌부 장령, 성 균관 사예, 시강원 보덕, 지제교가 되었고, 외직으로 남평, 능 성 현감과 순창군수와 담양, 남원, 강화부 사와 홍주목사를 역 임했다. 일찍 모친 봉양을 위해 담양부사를 자원하고 부임할 때 모 친께서 늙음으로서 공부(公府븡관리나 벼슬아치가 모여 나랏 일을 처리하는 곳)로 가기를 싫어하거늘 공(公)이 또한 감히 모친의뜻을어기지못하고아우이홍(以洪)으로하여금모친 을 모시고 창평 유곡 새터로 이거하게 한 뒤에 조석으로 공양 할음식을公이반드시맛보고담부(潭府)로부터유곡에보냈 으며, 유곡은 담부로부터 수십리인데 公이 어찌 가겠는가 담 부로부터 보내온 음식이 따뜻한 기운이 있었으며, 항상 때를 어긴적이 없었으니 그 지극한 효성과 우에는 세상에 드문 일 이다. 양친상(兩親喪)에 모두 시묘하며 3년 사이에 치아(齒牙)를 보이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았으니 비록 옛적 고자고(高子皐븡 공자의제자)의효도라도이보다더하지는못할것이다.일찍 외직을 지낼때가 많았으되 기묘년(1519년) 뒤로는 관직을 버 리고 종질인 전한공 명손(命孫)과 더불어 월영산장(月影山 庄)으로 가서 아우와 함께 산수(山水)간에 소요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세상에 숨은 것으로써 낙을 삼고 눌재 박상,모재 김 안국, 사제 김정국, 육봉 박우, 아우 월영당 이홍으로 더불오 서로 추종하다가 세상을 마치니 세상이 연주육현(聯珠六賢) 이라칭했다. 공의 첫 번째 부인은 광양서씨로 일찍 돌아가셨고, 그 다음 부인서영류씨는승사랑정(汀)의따님으로아들명세(命世), 명심(命諶). 명순(命純), 명우(命佑) 등 4형제요 따님은 목사 류성남에게출가했다. 장남명세는진사로따님이한분있는데유성남에게출가하 였고, 차자 명심(命諶)은 사마시에 올라 진사인데, 눌재 박상 선생은 홍주목사 박이관의 두 아들(명세, 명심)이 사마시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은 시실 남겼다. 븮남성(南省, 남쪽)에서 연꽃 따는 것 누구인가 몹시 바빴던 거라./ 그대의 집 두 아들 나란히 늘어섰다./ 청년 사마(司馬)의 의발(依鉢) 을 전해받아/ 쑥색 인수(印綬)의 수령의 집에 길상(吉祥)이 되었다./ 군사와 아전 뜰에 가득 모여 머리 조아려 축하하고/ 북과 피리 좌석 스끄럽게 하며 구름 뚫고 미친 듯이 울려난다. / 서로의 세상 잉태하고 기린(麒麟) 같은 싹 돋아나니/ 함께 동풍(東風) 경사스러워 하며 기쁜 눈물 콸콸 흘린다./ 시험장 에서 문재(文才)의 날카로운 자루에서 빠져나가기 바빴고/ 백벽(白璧)같은 빛 수재(秀才)의 행열에서 쌍지워 빛 드러냈 다./ 곤붕(鯤鵬)이 갈길에 비로소 상서 펼쳤다./ 앵무부(鵡鵡 賦)의 높은 재주는 처음으로 값 정해졌고/곤붕(鯤鵬)이 갈길 에 비로소 상서 펼쳤다./ 형이 자리를 피해서서 큰절을 하니 늙은 것 근심하고/아우가 첨잔(添盞)끝내니 미칠 듯이 흥이 난다./ 큰 경사 멀리 문하객을 놀래켜/ 미간(眉間)에 노란빛 솟고눈물고여오는것같다.븯하였다. 진사공(휘 명심)은 아들 륜( 맹), 규(揆), 양(揚) 삼형제를 두었는데 차자 규(揆)는 고봉 기대승이 문인으로 무오년(155 8년)진사시에올랐다. 보옹공의 삼남 명손(命純), 사남 명우(命佑) 또한 진사로 보옹공의 아들 4형제가 모두 진사에 올라 가문을 빛내었으나 두형제는불행이도후사를잇지못했다. 월영당공파는 황산공의 차자이고 보옹공의 동생으로 휘는 이홍(以洪), 字는 사의(士毅), 호는 월영(月影)이다. 학문이 뛰어나 중종 정묘년(1507년) 생원(生員)이 되고 또 명경(明 經,경서에 정통한 사람을 뽑는 과거)으로 급제하여 장차 세상 에 크게 쓰이게 될 것인데 도리어 파직을 당한 것은 공(公)의 천성이 강직하여 바른말을 하다가 간신들의 모함에 빠진 것 이다. 기묘년(1519년, 중종 14)에 천(薦)을 받아 과거를 보인 것은 정암 조광조 선생의 건의(建議) 한 바요, 용심순근 효제 숙저(用心醇謹 孝悌夙著)의 명목으로 천거하였으나 공(公) 은 진취할 뜻이 없고, 모친의 연로(年老)로서 사절하고 나아 가지않았다. 이해 겨울에 사화(士禍)로 정암 선생 이하 모든 현인들이 화를 피하지 못하였고, 드디어 공(公)에게도 미쳤다. 그러나 공(公)의마음은 본래 결백하므로세상이 공(公)을버리기전 에공(公)이먼저세상을끊어버리고월봉산으로들어가숨었 다. 산(山)은 창평고을 동쪽에 있는데 깊숙하고 궁벽한 곳이 다. 그때 백형 보옹공을 비롯 눌재 박상, 육봉 박우, 모재 김안 국,사재 김정국 등과 더불어 추중하니 이들이 곧 호남의 연주 육현이다. 공의자품이특수하고행실독실하며어려서아버지를잃고 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며 성성이 지극하고 백씨(伯氏)에게 공 손하며 지조가 담박하고 일찍부터 구차하게 얻으려는 마음이 없었다. 명경(明經)으로 강(講)하다가 글자 하나를 잊어버리 고 외우지 못하다가 누차 반복하며 생각한 뒤에 알게 되었다. 공(公)은 스스로 물러나고자 하니 고관(考官·試官)이 허락지 않고 말하되 대개 강(講)하다가 있었더라도 스스로 해득하면 낙제(落第)되는 법이 없다 하거늘 공(公)은 오히려 구차하게 얻음으로써 탓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뒤에 파삭(罷削)이 된즉 公의 지각은 또한 자세한 것이다. 기묘년 현량과에 응시 치 않은 것은 공의 뜻이 어디 있었는지 알수 없으되 얼마가 못 되어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화가 하늘에 뻗었은즉 공의 선견지명이 혹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공의 행동은 진 실로앞을보는것같다. 선생의 첫 번째 부인 최씨는 혈육이 없이 일찍 돌아가고 두 번째 부인 광산김씨는 부사 숭정의 따님으로 아들 오형제를 두었는데 유신(維新), 유철(維哲), 유년(維年), 유성(維成), 유길(維吉)이다. 장남 유신(維新)의 자는 지생(之生) 군자감 직장(軍資監 直長)이고, 오경(吳卿), 진경(眞卿), 장경(長 卿), 인경(仁卿) 등 4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오경(吳卿)은 첨 지중추부사에 올라 첨추공파(僉樞公派)로 세계를 잇고 있다. 첨추공의 차남 계업(繼業)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 섬긴다는 말을 들었다. 정유년(1597년) 왜란 때 처자식을 버리고 몸소 모친(母親)을등에업고산골짜기에숨어있었는데문득적병 이 돌연히 몰아오매 모친을 살해코자 하니 공이 숲속에서 뛰 어 나와 몸으로 가리다가 모자가 함께 피살되었다. 인조 갑자 년(1624)에 정려가 내려졌다. 첨추공의 사남 순업(純業)의 호는 성재(性齋)인데 그의 차 남종영(宗寧)의호는죽헌(竹軒)으로무과에급제하여풍천, 구성, 온성 도호부사를 지내고, 병자호란에 호조참판으로 어 가(御駕)를 호종하여 척화하는데 힘이 있었다. 그 뒤에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과 함께 북행(北 行)하여 구수(拘囚, 拘束)되었다. 이후 김상헌과 오달제와 더 불어 서로 주선하여 모시고 환국하였다. 갑신년(1644)에 두 번째 효종을 모시고 연경에 갔을 때는 거처가 추잡하여 기거 할 수 없거늘 공이 낮에는 등에 업고 밤에는 배위에서 잠을 자 도록 하며 시종 모시다가 호위하고 환국하니 모시고 따라다 닌지10년을하루같이하였다. 효종이 왕위에 올라 특히 은배(銀盃)와 묵죽(墨竹)을 4장 을 하사하며 충(忠)과 절(節)을 표창하여 그 기록이 심양일 록에 전해진다. 아들 문서(文瑞)의 호는 송암(松菴)으로 무 과에 급제하여 곤양, 풍천, 장단 군수를 지내고 병조참의에 올랐다.숙종경신년(1680)의 난(亂)에대사간김만중과판중 추 권대운, 영의정 민정중과 판서 조가석과 더불어 시종 협력 하여 큰 간난(艱難)을 안정시켰다. 이에 일등공신에 책록 되 었다. 성재공(휘 순업)의 삼남 종무(宗茂)는 무과에 급제하여 후 분위 부호군에 올라 그의 후손들은 부호군파로 세계를 이루 며,함경북도북천에세거한다. 직장공의 차남 진경(眞卿)은 장사랑으로 아들 효선(孝先) 을 두었으나 후사가 없고, 따님을 둘을 두었는데 이중 차녀가 주부 언양인 김기원(金紀元)에게 출가하여 능히 부도(婦道) 를 다하므로 김씨 문중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정유재란에 남 편과 함께 산중으로 들어가 숲속에 숨어 있으며 맹세하되 만 일 적병이 오게되면 나는 죽기로 결단 할 것이니 부군(夫君) 께서는 잘 피신하라고 하였다. 그 뒤 적병을 만났는데 적병이 의인(宜人)을 핍박코자 하거늘 의인(宜人)이 크게 꾸짖으며 죽기로써 항거하다가 마침내 피살되었다. 갑자년(1624)에 계 업과함께정려가내려졌다. 직장공의 삼남 장경(長卿)의 호는 신재(愼齋)이다. 16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법도에 넘치도록 애통해하며 죽을 마시며 3 년의시묘를마쳤다. 뱚파조별약사 함양박씨황산공파(黃山公派) 전남담양군창평면유곡리절산마을전경 뱚▶7면으로계속 함양박씨는신라제54대경명왕의셋째아들휘언신(諱 彦信)이속함대군에 봉해졌으므로문호가열리게되었 고속함이함양으로개칭됨에따라관향을함양으로삼 게 되 었 다 . 경명왕이 아들 8명에게 분봉한 시기는 삼국의 치열한 교전 등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잦았던 시기로 속함대 군 이후 문헌의 유실 등으로 세계를 밝힐 수 없어 고려 조예부상서를지낸휘선(諱善)을중시조로하여기세 (起世)하고있다. 중시조로부터 그의 13세손에 이르는 약 450년 동안 많 은 현관(顯官)과 무장(武將)을 배출하여 명문으로 성장 했다.2세휘인정(仁挺,예부상서),3세휘신청(信淸,예 부상서,검교신호위 무덕장군),4세 휘 윤정(允禎,판호 부상서,태부경 치사),5세 휘 신유(臣 찮)는 은청광록대 부(銀靑光祿大夫), 판리부상서(判吏部尙書)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주국 판삼사사(上柱國 判三司事)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 )는 충 질(忠質)이다. 충질공이 여섯 아들을 둠으로서 오늘날 함양박씨 6지 파(之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장자인 휘 지문(諱 之 文)은 군기소감(軍器少監)으로 제1파 소감공파, 차남 휘지빈(之彬)은조청대부위위윤(衛尉尹),시호는문원 (文元)으로 제2파 문원공파,삼남 휘 지량(之亮)은 판삼 사사(判三司事) 제3파 판삼사사공파, 사남 휘 지수(之 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제4파 부사공파, 오남 휘 지 온(之溫)은 감찰어사(監察御使) 제5파 어사공파, 육남 휘 지영(之潁)은 금오위 중랑장(金吾衛 中郞將) 제6파 중랑장공파이다. 현재광주전남지역에산재하며집성촌을이루고있는 함양박씨 후손은 제1파와 2파의 후손으로 이번호에는 제1파 군기소감공 后 동정공파 황산공 종중에 대해 기 술하고자한다. 뱚황산공파연원 삼세효자황산공박수화묘-전남나주시남평읍정광리선영 뱚 △보덕공파(輔德公派) 보덕공박이관 묘-전남나주시남평읍정광리선영 뱚 △월영당공파(月影堂公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