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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1월31일 월요일 6 (제181호) 기 획 전객령공파는 박포의 난(제2차 왕자의 난·방간의 난)을 평 정함으로써 공(功)이 많아 태종 원년(1401)익대공신(翼戴功 臣)에 녹훈(錄勳)되고 中正(靖)大夫 典客令(중정대부전객 령)지낸 후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피봉(被封)됨으로서 전 객령공파로세계를이루고있다. 전객령공파는 신라시조대왕의 적장자 가문으로 밀성대군 의 후예이다.밀성대군의 8세에 이르러 태사공(太師公) 휘 언 부(彦孚)는 고려문종(1047년丁亥)때 문과에 급제하여 최충 과함께태사(太師)를지냈고중서령문하시중도평의사를역 임하였으며 밀성부원군으로 피봉 되었으며, 아들을 둘 두었 는데 맏이는 효신(孝臣) 차는 의신(義臣)이다. 고려 인종은 양 형제를 효의양신(孝義兩臣) 또는 고려주석(高麗柱石)이 라 부르고 동방대성(東方大姓)이란 어필 넉자를 하사 했다. 유지는경북청도군풍각화산에있다고전해진다. 장자 효신(孝臣)은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이 되었고 평 장사로서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천자가 예로서 대우하여 치사하였고 본국에 돌아와 졸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라 사시하고 인종묘에 배향하였다. 의신은 공부상서로서 종반 (從班)인 양신(良臣:彦祥의 아들),직신(直臣:彦仁의 아들)과 더불어세상에서삼언사신(三彦四臣)이라 알려져있다. 공필(公弼)은 효신의 아들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대장군 도 검사 병부상서를 역임하였다. 공은 문무에 재주가 겸비하여 고려 예종(1107년) 2년에 윤관과 같이 여진을 쳐서 평정했다. 뒤에 진국공신으로 추존되었고 시호를 충열(忠烈)이라 사시 하였고,아들은육경이다. 육경(育慶)은 1130년 인종8년에 대장군과 병부상서를 지냈 다. 또 1135년에 김부식과 함께 적(賊)조광 등을 쳐서 평정하 였다. 또,글을 올려 양현고(養賢庫)를 세워서 많은 선비를 기 르게 하고 또한 모든 고을에 널리 학사를 설립하였으며 국사 를보살펴수정하였다. 아들 대화(大和)는 대호군 이부상서였으며 수문전(修文 殿) 대제학으로 문무가 겸전하였다. 간(幹)은 대화의 아들인 데문과급제하여병부참정(兵部參政)을거쳐 이상(貳相,좌우 찬성의 별칭)이었고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배위는 추화군 부인(推火郡夫人)밀성손씨(密城孫氏)인데 여지승람에 기록 되어 있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영균(永均)·세균(世均) 형제 이다. 장자 휘 영균(永均~1300)은 고려조에 익대공신으로 벼슬은 판도판서와 삼재(三宰)를 역임하였고 응천군으로 봉군되었 다.뒤에 또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시호는 문헌(文憲)으로 사시되었고 묘소는 경남 창녕군 계성면 광계 마을(산82번지)뒤을좌(乙坐)구릉에있다. 은산부원군 휘 영균은 슬하에 아들 셋 딸 넷을 두었는데 첫 째는익(翊:초휘는天翊)이요,둘째는천경(天卿),셋째는문 경(文卿)으로 장자는 송은공파 차자는 전객령공파, 삼자는 순찰사공파로각기세계를이룬다. 전객령공파는 은산부원군 휘 영균의 차자로 1374년(甲寅) 에 태어났다. 박포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익대공신에 녹훈되고 중정대부 전객령에 이르러, 밀성부원군에 피봉되었 다. 벼슬을 마치고 돌아와 1462년(壬午, 세조7)에 돌아가시니 향수(享壽) 89세이다. 왕께서 부음을 듣고 심히 슬퍼하시어 직접 향(香)과 ‘얼음과 옥처럼 청렴(淸廉)하고 지초(芝草)와 난초(蘭草)처럼 인품이 고결하고 의리와 충성심을 세상을 감 동케 하였으며, 모든 행동과 몸가짐이 정중(鄭重)하였고, 더 듬는 말씀마다 덕성(德性)이 흘러 공맹(孔孟)의 풍색(風色) 을 본 땄노라’ 하는 제문(祭文)을 내려 치제(致祭)케 하였다. 시호는 충의(忠毅)이고, 배위는 정부인 창원공씨(1794년 曲 阜로 改寬) 판서 신주(臣팬)의 따님으로 아들 부(敷)를 낳았 다.묘소는선영동원에을좌(乙坐)로정부인과합부이다. 휘 부 (敷 ) 의 자 (字 )는 경 오 (敬 五 ) , 호 는 농 암 (聾 庵 )으 로 1 4 12년(壬辰, 태종12)에 태어났다. 절재김종서(節齋 金宗瑞)와 육진(六鎭)을 개척(開拓)하고 벼슬은 시위사(侍衛司) 호군 (護軍)과 숭정대부에 오르고 행직은 좌참찬 겸 지경연춘추관 사를 지내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피봉(被封)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고, 부인은 초계정씨 평시령 숙정의 따 님이다.묘소는창녕군이방면석리산142번지 艮坐이고 公은 前 이고 배위는 後에 상하분(上下墳)이다. 사대석(莎臺石, 묘 소를 보호하기 위해 병풍석 대신 세운돌)이 있었으나 비석이 보이지 않고 좌석(坐席)만 있어 1862년 8월에 비석을 다시 건 립하였으며, 2003년 9월 8일 경상남도 문화재(기념물) 제250 호로지정되었다. 문정공(휘 부)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윤원(允元)·윤형 (允亨)·윤리(允利)·윤정(允貞)으로 장자 윤원은 후사가 없 어 동생 윤리의 차남 추(樞)로 하여금 대를 이었으나 그마저 도후사가없고,차자윤형또한무후(无后)이다. 셋째 휘 윤리(允利)의 자(字)는 추겸(秋兼) 호는 양심정 (養心亭)이다. 1453년에 태어나 윤필상(尹弼商)과 함께 건주 위(建州衛)여진(女眞,만주동북부에살던퉁구스계의민족) 을 정벌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과 함께 도의 (道義)로서 사귀었다.1498년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평북 용천 에 유적(流謫, 유배)되었으나 1506년 중종원년에 몽유(蒙宥, 죄인이 형이나 감옥 따위에서 풀려남)되어 일천(逸薦)으로 옥구현령 병마절제사를 지내고 1511년 향년 69세로 돌아가신 후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에추증되었다. 아들 사형제를 두었는데 기(機)·추(樞)·계동(繼東)·해 (楷)이다. 장자 기(機)의 字는 숙위(淑衛) 호는 오죽헌(梧竹 軒)으로 1471년(辛卯,성종2)에 태어나 효행과 학행으로 천거 되어 충무위 부사직을 지내고 1513년(중종8)에 소릉(昭陵,단 종의 생모 현덕왕후 능)의 복원을 주청(奏請)하였으며, 돌아 가신 후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공은 아들 승 효(承孝)·승백(承伯)·승숙(承淑)·승서(承緖)인데 장자 승효 (承孝)의 아들 인정,인후,인종 삼형제는 무후이고 인지는 아 들응청을 낳았는데무후이다.차남 승백(承伯)은 경상순무어 사(慶尙巡撫御使)로 순무어사공파(巡撫御使公派)로 세계를 이루고, 삼남 승숙(承淑)의 字는 계명(繼明) 호는 완가정(玩 稼亭) 충무위 여절교위에 음보(蔭補)되었고, 1519년 효행과 청렴으로 천거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정암 조광조 등 제현들 과 함께 북문지화에 피화되어 1521년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545년(인종 원년)에 방환되었다.그러나 윤임을 구하고 이기 (소윤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데 주도적 역 할을했다.)를배척하다오히려화를입어회재이언적과동시 에 유배를 당하여 1577년(선조10) 방면되었다. 돌아가신 후 통훈대부통례원좌통례에추증되었다.공의후손들은지족당 공파(知足堂公派), 삼오정공파(三五亭公派), 부사공파(府使 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로 각기 세계를이룬다. 오죽헌공(휘 機)의 차남 추(樞)는 하동현감으로 백부 윤원 의 뒤를 이었으나 후사가 없고, 삼남 계동(繼東)은 참의공파 (參議公派)이고,넷째 해(楷)는 구보(舊譜)등 일련의 사유로 지난 을해보(1995년)에 합보하지 않아 아쉽게도 상세하게 전 하지못한다. 농암공(휘 부)의 넷째 휘 윤정(允貞)은 좌승지로서 후손들 은좌승지공파(左承旨公派)로세계를이룬다. 순무어사공파는 전객령공의 증손 오죽헌공(휘 기)의 차자 휘 승백(承伯)으로 인해 문호가 열린다. 공은 어려서부터 선 고(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으로 성장하였으며, 강상의 법도를 준수하고 가전(家傳)을 숭상하여 충효세가(忠孝世家)를 더 욱 현창하였다. 일찍이 진사에 올랐으며 이어 문과에 급제하 여 봉직랑을 거쳐 순천교수를 지내고 경상순무어사를 역임하 였다. 숙부인 진주하씨와의 사이에 덕성(德成)·덕신(德新)·덕순 (德純)을 두었는데 장자 덕성의 아들 양은 아들 유문에서 후 사가 없고차자해(海)는 재종숙(再從叔)영월부사 휘덕신에 게로 출계하였고,셋째 홍(洪)은 아들 취문,익문이 후사가 없 어 무후이다. 어사공의 차자 덕신은 후사가 전해지지 않는다. 묘는 광계리 산59-1 묘좌 유향으로 숙부인과 합부이다.(추원 재뒤편) 순무어사공의 셋째 덕순(德純)의 호는 윤암(倫庵)으로 기 개와 도량이 준엄(峻嚴)하여 소절(小節)에 굽히지 아니하고 약관에 전력부위(展力副尉)에 피천(被薦)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 탐구에 전념하였다.아들 징(徵)·잠(潛)·한(瀚)· 찬(澯)·곤(混) 등 4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징(徵)은 무후이고 차자 잠(潛)의 호는 설재(雪齋) 병절교위 좌부장이고, 그의 아들 명윤(明胤)의 자는 효숙(孝淑) 호는 사옹( 汎翁)으로 성 균 진사이다. 일찍이 한강 정구 선생 문하에 사사(師事)하였 으며,학문이 크게 통달하여 당세의 사표가 되었다.낙재 서사 원, 여헌 장현광, 석담 이윤우 등과 더불어 도의로서 사귀었 다. 효성이 출천하여 임진왜란 피난길에 갑자기 왜놈을 만나 흉봉(무시무시한 큰 칼)으로 아버지를 치려하니 몸으로 막아 유혈이 낭자(浪藉)하여도 피하지 아니하고 통곡하니 왜적도 공의 효성에 감복하여 칼을 거두고 갔다.후에 곽 망우당의 창 의에 함께하여 진중의 모든 일을 함께 의논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여묘할때40여리의여묘(廬墓)길을눈비가리지않고 질대(상복을 입을 때, 머리와 허리에 두르는 띠)를 벗지 않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성알(省謁)하였다. 아버지 상(喪)에도 어 머니와 똑같이 삼년동안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효행과 도학 으로 추중되어 향천(鄕薦)과 관천(官薦)에 올랐으나 끝내 응 하지 않았으니 이 사실이 성산지와 여지승람에 기록되었으며 한강 정구 선생의 한강집에는 당시의 상황을 담은 편지에 다 음과같이전한다. 뷺삼가 상중에 있는 그대 형제의 편지를 받고 새해가 돌아온 지금, 신령이 도우시어 그대들의 상중의 건강이 좋다는 것을 살펴 알고 나니 위안되는 마음 한량이 없네.다만 그대 누나와 생질이뜻밖에세상을떠났으니이어찌효숙(孝叔박명윤(朴 明胤)) 집안의 불행만 되겠는가. 서로 아끼고 사랑한 온 고을 벗들의 정에 있어서 누구나 가슴이 무너지는 슬픔을 가눌 수 없을 것이네. 다시 생각해 보면 자정(子禎)의 진실 되고 단정 하며 영민한 자질을 이제 어디서 다시 볼 것인가.평소에 누구 보다도 그를 가장 사랑했던 늙은 이 몸은 비록 병이 깊어 금방 죽을 처지에 놓여 있기는 하나 목이 메는 슬픔에 어떻게 마음 을가눌수없네.더구나부모의상을당해괴로움과슬픔이한 창 깊은 그대 형제들은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생각이 여기 에미칠때마다한층더가슴이쓰리고한탄스럽네.뷻 사옹공(휘 명윤)은 아들 6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효자로 이름나고 학행 또한 뛰어났다. 특히 셋째 진구(震耉)는 한강 정구 선생에게 사사(師事)하고 당대의 거유들과 도의 지교하 였으며, 퇴계 선생이 무고(誣告) 당할 때 사림(士林)을 일깨 워 안동에 설청(設廳)하고 재차 상소하여 변정(卞正,변명하 여 바로잡음)하니 양소(兩疎)가 모두 공이 지은 것이다. 평생 후학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으며, 효우와 문장으로 당세에 이름을떨치니여지승람에전한다. 윤암공(휘 덕순)의 넷째 휘 찬(燦)의 호는 설봉(雪峰)으로 일찍이 과업(科業, 과거)을 폐하고 명리를 단념하고 남명의 문하에서 사사(師事)하고 한강 정구, 동강 김우용과 도의로 서 교분을 맺고 또 퇴계의 문하에 교유하여 학문과 덕행이 뛰 어났다.윤암공의 다섯째 곤(混)은성균생원으로 1592년 임진 왜란에조카사옹공(휘명윤)과함께곽망우당과창의하여의 령에서 벌어진 정암진 전투에 참전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이 일어나자 화왕산 방어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다시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쓰다가 1627 년(인조5)에생을마감했다. 지족당공파는 오죽헌공(휘 機)의 차남 완가정공(휘 승숙) 의 증손 명부(明 뻘) 公으로부터 기일세 하고 있다. 완가정공 의 字는 계명(繼明)이고 완가정(琓稼亭)은 아호이다. 숙부인 초계정씨와의 사이에 덕형(德馨)·덕총(德聰)·덕신(德新) 삼 형제를 두었다. 장자 덕형(德馨)의 字는 계욱(季郁) 호는 이 진( 視眞) 또는 수우당(守愚堂)으로 1529년(己丑, 중종24)에 태어나 유일(遺逸,조선시대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 거하는 인재 등용책)로 천거되어 봉정대부이고, 함안훈도를 지냈다.사후에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지경연참찬관에추 증되었으며, 지족당공의 조부가 된다. 차자 덕총(德聰)은 삼 오정공파(三五亭公派), 셋째 덕신(德新)은 부사공파(府使公 派)로세계를잇는다. 뱚파조별약사 밀성박씨전객령공파(典客令公 派) 밀성박씨전객령공파는신라시조왕(휘혁거세)의후예중백파(伯派),즉장손가인밀성대군후예이고그중에 서도 맏집인태사공(휘언부)후은산부원군의세아들중차차휘천경(天卿)이다.장자휘익(翊)은송은공파셋째 휘문 경(文卿)은순찰사파이다. 경남 함양과 창녕 경북 성주,청도 전남 장흥에 세거지를 두고 있는 전객령공파는 전국에 3천여호에 달하고 있으 며,순무어사공파(巡撫御使公派)를 백파(伯派)로 그 아래지족당공파(知足堂公派),삼오정공파(三五亭公派) ,부사 공파(府使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참의공파(參議公派),좌승지공파(左承旨公派)등7개파로분파되었다. 뱚▶7면으로계속 전객령공파연원(淵源) 전객령공묘소-창녕군계성면광계리산82 전객령공파선원(璿源) 전객령공파세계(世系) △순무어사공파(巡撫御使公派) 경모재-경북 성주군 수륜면 토실마을 순무어사공의 아들 윤암공 휘 덕순 이하 선조제사. △지족당공파(知足堂公派) 농월정,함양군안의면화림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