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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0월31일 일요일 6 (제178호) 기 획 진도종중은 신라만고충신 관설당 박제상 선생 의 32세손으로 자(字)는달원(達遠)호(號)는 부 곡(富谷) 휘는 형손(亨孫)으로 1442년(세종24) 에 태어났다. 아버지 춘파공(휘 근무)와 함께 강 진에서 진도로 이거하면서 후손들은 진도종중 또는 옥주파(沃州派)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부곡공은 천부(天賦)의 성품(性品)으로 충실근 면하고 글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지조(志操)는 변치 않았으니 세인들이 그 선조들이 대대로 쌓 아온미덕(美德)의유풍(遺風)이라하였다. 아버지 춘파공은 진도로 세거지를 옮긴 이후 진도군과 해남현이 해진군으로 합병 되었다가 2 8년 만에 진도군 재 설군 칙령(勅令)에 따라 지 역 유력 인사들과 합세하여 재 설군의 개역사(大 役事)에 잎장 서 공을 세웠고 진도로 유배된 여 러 명현 고관대작들과 친교 협력하여 진도 세속 과 문물 창달에 크게 기여함과 동시에 특히 후학 양성에 진력 하였다는 문헌에 따른 종중의 언질 이다. 실제로백형숭지(崇地)의비문을당시의석학 좌의정 어세겸이 비문을 짓고 우의정 김응기가 전서로쓴기록으로미루어짐작할만하다. 진도문중은 함안에서 강진을 거쳐 진도에 입 향 한 춘파공(휘 근무)의 차남 부곡공(휘 형손) 을 기 1 세 로 하 고 있 다 . 선원(璿源)을 보면 신라 파사왕의 후예로 6세 휘 제상은 ‘차라리 계림(신라)의 개,돼지가 될지 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 없다.’하고 충절을 지키다 목도(木島-日本 九州지방)에서 순국한 신라만고충신이다. 미추왕(味鄒王 261-284)의 동생인 대서지(大 西知)의 아들이 내물왕(奈勿王 356-402)이며, 내물왕의 동생이 실성왕(實聖王 402-417)으로, 내물왕의 아들들이 어리므로 강압적으로 왕이 되었는데, 내물왕의 장자 눌지(訥祗)는 미친 사 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녀 실성왕이 도외로 치고, 둘째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고, 셋 째 미사흔(未斯欣)은 왜(倭)로 인질로 보내었 다. 이에 박제상이 주축이 되어 신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 등과 실성왕의 부당한 처사를 거론하니 실성왕이 눌지왕(訥祗王 417-458)에 게양위하였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하여 일본에 억류된 아 우를 그리워하며 신하를 보내어 귀환을 여러 차 례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박제상 이 고구려로 가서 뷺한 뿌리의 후예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뷻라는 한마디로 복호 를 데려왔다. 그리고 박제상은 다시 미사흔을 구 하기 위해서 왜국으로 떠나 그해 7월에 그곳에 도착, 뷺신라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나를 해치 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뷻하고 망명한 것으로 가장 했다. 왜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장차 신라를 칠 때 미 사흔과 그를 앞잡이로 삼으려는 속셈을 품게 되 었다. 왜왕으로부터 어느 정도 신임을 받게 되자 그는 자주 미사흔을 데리고 바다에 나가 뱃놀이 를 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 척 을 분 간 할 수 없 도 록 안 개 가 끼 자 그 는 바 로 뷺이때다뷻하고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떠나보 냈다. 박제상의 활약으로 두 아우를 무사히 찾은 눌 지왕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노래를 지어 불렀으 니그 노래가 유명한 븮우식곡븯(憂息曲)이다. 한편 미사흔을 떠나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박 제상은 감시하는 왜인에게 뷺왕제는 몸이 피곤해 서 주무시고 계시오뷻하며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발각되어 왜왕 앞에 묶여 나가 문초를 받게 되었 다. 뷺나의 신하가 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뷻는 왜왕에게 뷺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나는 계 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 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 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뷻하며 굴복하지 않 았다. 발바닥을 벗겨 갈대밭을 끌고 다녀도 뷺나 는 계림의 신하다뷻하며 굴복하지 않고 불에 달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아니하자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시켰다가 마침내 불에태워죽이고말았다. 이후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충절을 본받 기 위해 사우를 세워 향(香)을 올렸다는 것이 구 전으로 전해지고, 대마도에는 순국비가 세워졌 다. 관설당공의9세 휘인범(仁範)의字는 수여(秀 汝), 선덕여왕 정미년(丁未, 647년)에 태어나 문 무왕 기사년(669년)에 우사녹관주서에 병부령 원외랑이 되었으며,678년에 왕이 경성에 새로운 성을 축조하려 하여 공이 아뢰기를 “비록 초야의 초옥에 살더라도 바른 도리를 행하면 복록을 오 래 누릴 것이요,그렇지 못하면 비록 사람을 수고 롭게 하여 성을 쌓더라도 또한 유익함이 없을 것 입니다.”하니 왕이 곧 중지하였다. 신문왕 계미 년(癸未, 683)에 공자묘당 대사녹사에 임명되어 시중(侍中)으로 승진하였고, 685년에 대총관 대 아찬에 올라 당나라에 들어가 공물(貢物)을 바 칠 때 경주 용삭사를 지나면서 시를 지었으니 다 음과같다. 븮신선이 사는 듯 한 누각이 으리으리하게 하늘 에 솟았고, 월전(月殿, 달이비치는 전각)에 피리 소리역력하게들리구나등불은반딧불빛을흔들 어 새 다니는 좁은 길을 비추고 사다리는 무지개 그림자를 돌아 바위 빗장에 기울었도다. 사람은 흐르는 물 따라 언제나 다할 것인가? 대나무는 차가운 산에서도 만고에 푸르구나.(한 귀는 전하 지 않 음 )븯 이는 백성들의 고초를 빗대어 지은 듯 하여 그 의애민정신을엿볼수있다. 성덕왕 병자년(736년) 향수 90세에 돌아가시 니 당나라에서도 비단 50필과 조문을 보내 애도 하였으며,왕이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냈고,문충 (文忠)의 시호가 내려지고 ‘악본기(樂本記)’와 설총전(薛聰傳)에실려전해진다. 관설당의 17세 휘 술홍(術洪)은 비운에 붕어 (崩御)한 경애왕의 시호를 짓고 절의를 지켰다. 뱚헌강왕 계묘년(883년)에 태어나 효공왕 임신 년(912)에 과거에 급제하여 신덕왕 계유년(913) 에 웅령전 박사로 임용되고 공무원외랑으로 옮 겼다가 경명왕 무인년(918년)에 이찬(伊豫)이 되었는데 6월에 궁예의 휘하에 인심이 변하여 고 려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고 기묘년(919) 에 성악으로 도읍을 옮기니 경진년(920)에 왕이 태조와 더불어 사신을 교환하고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경애왕 정해년(927)에 병부낭중에 임명되어 후당(後唐)에 들어가 공물(貢物)을 바치니 장종 (莊宗)이조의대부시위위경겸어사(御使)를제 수하였다. 돌아와서 대아찬 겸교상서 좌복야에 임명되었는데 겨울 11월에 견훤이 군대를 인솔 하여 왕과 왕비를 시해하고 왕의 외종제 김부로 써 나라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니 이분이 경순왕 이다. 서궁(西宮)에 빈소를 차려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고 시호를 경애왕(景哀王)이라 올린 후 공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다시는 세 상에나가지않았다.시호는공효(恭孝)이다. 공효공의 증손(관설당20世) 휘 광염(光廉)의 호는 청허당(淸虛堂)으로 광종 신해년(951년) 에 태어났다. 성품과 행실이 단정하고 깨끗하였 으며,충성과효도에독실하였다. 성종 계미년(983)에 평장사 최승로 공이 적극 추천하였으며,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왕이 시 부(詩賦)로써 친히 문신(文臣)들을 시험했는데 공이 역시 제일 위가 되어 황패(黃牌)를 하사하 였고,여러차례전근되어보궐(補闕)이되었다. 뱚파조별약사 경주박씨춘파공파진도종중(珍 島宗中) 유방사(遺芳祠)전경(1938년건립)-전남진도군진도읍교동리북상마을 관설당,문효공,문목공,춘파공의위패를봉안하여매년음3.3일향사한다. 입도조(춘파 공휘근무)이하 선조묘원 전남진도군고군면벽파리(진도대교가세워지기전바닷길이 제일쉬운수로 지점으로 입도하여안착한 곳이다. 경주 박씨(慶州朴氏)는 신라 시조왕 박 혁거세의 후손으로 영해(寧海)·면천(沔 川)·강릉(江陵)·우봉(牛峰) 박씨와 함께 상고 세계(世系)에서 분적 한 파사왕(破 娑王)계통이다.따라서 경명왕(景明王) 의 여덟째 왕자인 월성대군(月城大君, 휘 언인)에 봉해져서 월성으로 관적(貫 籍)한 월성 박씨와는 계통을 달리하고 있으며, 경주 박씨는 파사왕의 25대손 이요, 신라만고충신 관설당 박제상(朴 堤上)의 21대손인 박도덕(朴度德)을 중 조로 하여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경 주박씨의관적지는경주지만고려의수 도 개경으로 옮겨 대대로 높은 벼슬과 충신효자를배출한고려조의명문으로 문효공(휘 도덕)의 9세에 휘 연(演)의 아 들 형제 원계(元桂)·지계(之桂)에 이르 러 차남 지계는 강릉박씨로 세계를 잇 고,장남문목공휘원계의자신(自信)은 앙(鴦,개명왑)·근무(根茂)를 두었다. 장남앙(諱왑-시조왕의41世)은단종조 에 홍문관 저작으로 관직에 있을 때 왕 위를찬탈당하자벼슬을버리고김시습 등과 함께 수양산으로 들어가 절개를 지키고 만년에 함안으로 복거(卜居)한 휘저작공파로세계를잇고있다. 차남 근무(根茂)는 전남 강진으로 세거 지를 옮겨 아들 숭지(崇地)·형손(亨孫) 을형제를낳고,이어차남형손(亨孫)을 데리고 진도로 옮겨 강진에 두고온 장 남 숭지는 춘파공파 강진종중(康津宗 中),차남 형손은 춘파공파 진도종중(珍 島宗中)로 각각 세계를 이루고 있어 이 번호에서는전남진도에집성촌을이루 고 있는 춘파공파 진도문중을 소개해 본다. 춘파공파진도종중연원 진도종중의세계(世系) 유방사 모원재(유방사아래에있다.) 뱚▶7면으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