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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3월31일 수요일 6 (제171호) 기 획 의흥박씨의 관향조는 박을규(朴乙規)이다. 개성왕씨(開城 王氏)의 후예로 고려 태조 왕건의 후예이기도 해 대대로 고려 왕족으로 외가의 성(姓)으로 개성(改姓)한 본관이다.고려 말 이부상서를 지낸 왕갑규(王甲規)와 병부상서를 지낸 왕을규 (朴乙規) 두 형제는 이성계 일파의 계획을 미리알고 난을 피 하고 사직과 종족보존을 위해 의논 한 바, 왕이 척살 당하고 그 모든 왕족이 멸살을 당하는데 왕실의 지친으로 충과 효를 생 각 할 때 종 실 의 보 존 과 사 직 의 복 원 을 위 해 백 이 (伯 夷 ) 숙 제 ( 叔 齊 )의 본 을 받 고 은 ( 殷 )의 삼 인 (三 人 )인 미 자 (微 子 )븡 비자(比子)븡기자(箕子) 등이 스스로 자기를 다스려 절제를 지킨 예를 본받아 형인 갑규 공은 배를 타고 중원(중국)으로 떠나고, 아우인 을규 공은 소백산 자락인 춘성군 차의동(현 단양군 영춘 별방 만종 부근)으로 내려와 은거하여 조상의 제 사를 섬기며 과거 원덕왕(元德王)의 고사를 본 받아 외가 성 을 따라 성을 바꿔 훗날을 기약하기에 이르니 바로 의흥박씨 이다. 조선 태조 3년 4월 ‘왕씨를 가진 사람은 고려 왕실의 후 예가 아니더라도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해지기도한다. 개성왕씨 왕을규의 개성(改姓)을 이해하기 위해 고려의 멸 망과 함께 위기에 처한 개성왕씨에 대해 피력해야 할 것 같아 ‘위키백과’사전과개성왕씨족보를인용해본다. [위키백과] 조선 태조 원년(1392년) 7월 20일 사헌부 대사 헌(大司憲)민개(閔開)등이 고려 왕조의 왕씨를 밖에 두기를 청하니, 조선 태조가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과 그 아들 강(康),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와 그의 아들 조( )·관 (琯)을 제외한,나머지를 모두 강화(江華)와거제(巨濟)에 나 누어 두게 하였다. 8월 20일에는 고려 왕씨들의 노비의 수를 줄였다. 2년5월26일에는왕명에따라도평의사사에서경상도안렴 사와 거제 병마사에게 이문(移文)하여 거제로 보내졌던 왕씨 일족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해서, 완산(完山)·상주(尙州)·영 해(寧海)에나누어거처하게하였다. 3년 1월 17일에는 김가행(金可行)과 박중질(朴仲質)이 점 쟁이에게 공양왕과 왕씨의 명운을 물은 역모를 하자, 다시 일 부 왕씨들을 거제도로 옮겼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1월 21일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왕씨를 제거하자고 청하였고, 2월 21 일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왕강(王康), 왕격(王 교), 왕승보 (王承寶),왕승귀(王承貴)의가족들을모두해도로보낼것을 청하였고,2월 22일,2월 23일에도 왕씨 일족의 죄를 청하였으 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5일에는 대간과 형조에서 박 위(朴 쭈)도 모의에 가담했다고주장하였다.26일에다시공양 (恭讓) 삼부자(三父子)를 법에 처하고, 왕강, 왕격, 왕승보, 왕승귀의일가를모두해도(海島)로내쫓고,강화(江華)에보 내졌던 왕씨도 해도로 귀양 보내라는 상소가 올려 지자 조선 태조는 역시 거절하였다. 이에, 대간과 형조에서 정사(政事) 를 보지 않는 시위를 하자,왕강은 공주(公州)로,왕격은 안변 (安邊)으로, 왕승보는 영흥(永興)으로, 왕승귀는 합포(合浦) 로귀양보내졌다. 2월 27일에 조선 태조는 사헌부에 명령하여 강화에 살고 있 는 왕씨 중 늙은이와 약한 자를 보살피라 명령했다.4월 1일,1 0일에 또 다시 왕씨를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4월 14일에 다시 상소가 올라오자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중추원 부사(中 樞院副使) 정남진(鄭南晉)과 형조 의랑(刑曹議郞) 함부림이 삼척으로, 형조 전서(刑曹典書) 윤방경(尹邦慶)과 대장군 오 몽을이 강화도로, 형조 전서(刑曹典書) 손흥종과 첨절제사 (僉節制使) 심효생이 거제도로 왕씨를 제거하려 보내졌다. 4 월 15일에 윤방경 등이 강화에 있던 왕씨 일족을 강화 나루에 빠뜨려 죽였다. 4월 17일에는 공양왕 일가가 살해되었으며, 4 월 20일에 손흥종 등이 거제도에 있던 왕씨 일족을 바다에 빠 뜨려 죽였고, 같은 날에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 하여이들을모두목베었다. 4월 26일 고려 왕조에서 왕씨로 사성된 일족들은 모두 본성 으로 환성하게 했으며, 왕씨를 가진 사람은 고려 왕실의 후예 가아니더라도어머니의성을따르게하였다. 6년 12월 1일에는 왕씨의 서얼인 백안(伯顔)·연금(延金)· 금만(金萬)이 성명을 달리 바꾸고 지내었다가 발각되어 처형 되었다. 12월 8일에는 역시 고려 왕씨의 서얼인 약사노(藥師 奴)가교살(絞殺)되었다. 조선 태종 13년 11월 15일에는 왕휴(王塡)의 아들 왕거을오 미(王巨乙吾未)가 붙잡혔다.왕휴가공주 사람이밀충의 누이 를 첩으로 맞아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거을오미이다. 태조 3 년에 왕씨가 도륙 당하였을 때에는 그 어미가 무지하였기 때 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또한,여러 왕씨의 후손들이 중이 되어 산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 사찰을 조 사하라는명령이내려졌다. 13년(1413) 11월 26일에 왕거을오미를 석방하고, 태종이 뷺금후로는 왕씨의 후손이 혹은 스스로 나타나거나,혹은 남에 게 고발을 당하는 자는 아울러 자원(自願)하여 거처(居處)하 는것을들어주어서그삶을평안하게하라뷻고하교하였다.하 지만, 11월 29일, 12월 1일에 왕거을오미를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오기도하였으나기각되었다. 16년 11월 1일에는 왕상우(王上尤)가, 왕씨의 후예가 이수 라는 자의 여종과 혼인하여 낳은 자식이라고 하여 그 주인 이 수에 의해 고발되었다. 5일에 그 아우 왕화상(王和尙)과 함께 풀려났다. 조선문종1년11월1일과6일에왕씨의후예를찾아제사를 받들 게 할 것을 명하였다.얼마 뒤에,제우지(齊牛知)라 변성 하여공주에숨어살던왕우지(王牛知)가이웃사람과밭경계 를 가지고 다툼이 벌어지더니 이웃 사람이 관가에 왕씨라고 밀고하여 붙잡혀 오게 되었는데, 오히려 조정에서는 숭의전 부사(崇義殿副使)라는 관직을 내려주었다.뒤에 왕순례(王循 禮)라는이름도내려졌다. 멸족령을 피해 왕씨들이 王과 비슷한 글자인 田, 全, 玉, 車, 申등으로변성하였다는설이있다. [개성왕씨 족보에서 옮김] 왕건 태조로부터 시작된 고려조 는공양왕까지34왕475년 동안 이어져 왔다.이태조 원년(139 2 년 ) 7 월 영 을 내 려 왕 씨 성 을 쓰 는 모 든 사 람 드 은 거 제 와 강 화에 분산하여 배치를 하였다. 1394년 4월 14일 정남진, 함전 림을 삼척에 파견하고 윤방경, 오몽을 강화에 손흥종 심효생 을 거제에 파견하였다. 15일 윤방경 등에게 강화에 있는 왕씨 들을 몰살시키고, 20일 손흥홍 등에게 거제에 있는 왕씨들을 몰살 시켰다.바다에서 죽은 이가 거의 백이 넘고 내외에 영을 내려 왕씨 사람들을 샅샅이 수색을 하여 찾아내어 서자까지 베어죽였다.그리고또영을내려왕씨성을가진자를보호하 거나숨겨주는자는누구를막론하고끝까지닦달하였다. 태종13년(1413癸巳)11월 영을 내려 지금부터 왕씨 후예들 이 혹 시 남 에 눈 에 띄 었 을 때 고 하 지 않 는 자 나 같 이 소 식 을 듣는 자나 용서하고 왕씨들이 스스로 원하여서 거처를 삼아 안전하게 살아 갈 수 있 게 선 처 를 베 풀 때 까 지 2 1 년 간 을 죽 음 의 길로 가거나 수 많은 사람들이 멸족을 면하기 위해 성을 바 꾸고, 왕씨 성을 가진 자들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자손들에 게 크 게 번 영 하 지 못 하 고 살 아 남 은 자 들 은 암 흑 속 에 몸 을 숨 겨 자 기 들 의 존 재 를 세 상 에 숨 기 고 살 아 야 했 다 . 의흥박씨의 최초 족보는 시조 박을규 공의 11世 임호공(휘 수검)이 1680~1690년 경 족 보 의 초 를 잡 았 고, 이를 토대로 14世 휘 호채 공이 1783년 족보를 만들기 위해 수단을 받다가 1784 년 유명을 달리하면 서 그 의 아 들 현 두 , 상 순, 문순, 세순 등이 이어받아 1788년부터 작업하기 시작하여 3 1년 후인 1819년 목판 본으로 발행 되었으 며, 후손들에 의하면 개성왕씨 핍박을 피 해 세 종 때 에 비 로 소 출사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박을규 公을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온 의 흥 박 씨 는 족 보 상 고려 말 한림학사를 지낸 휘 견(堅)이 수 록되어 있으나 생몰 연대가 미상으로 56 년간의 중간 계대(系 代)가실전되어후손득서(得瑞)로부터대(代)를이었다. 득서(得瑞)공(公)은 시조로부터 은거하던 의흥박씨의 존 재를처음부각시킨인물로처음출사(出仕)이이르러운산유 학교도(雲山儒學敎導)를 지냈으며, 아들 근(瑾)을 두었는데 세종 29년(1447)생원시에합격하고단종때문과에급제하여 세조 원년(1455)에 주부에 올라 한 확(韓 確), 정인지(鄭麟 趾)최항(崔恒),황수신(黃守身)등과 더불어 좌익공신에책 록 되었고,세조 10년(1464)에 충주판관을 거쳐 성종 때 교하 현감과 나주목사를 지내고 영암군수와 1486년(성종17, 丙午) 소격서령(昭格署令)을지냈다. 군수공(휘 근)은 아 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 지홍(之洪)은 성종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사과(司果)를 거쳐 호군(護 軍,정4품) 지냈으며, 차자 지강(之江)은 후사가 전해지지 않 는다. 호군공(護軍公, 휘 지홍)은 아들 셋(질·서·증)을 두었는데 장자 질( 풔)의 자(字)는 자산(子山)으로 김종직의 무오사화 를 지켜보면서 한탄하기를 옛날부터 군자라는 것은 좋은 정 치를 보면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원하고 혼란기에는 물러난다 하였으니 매부(妹夫) 이 타(익재 이제현의 7세손)와 함께 운 림 속에 은둔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이후 중종반정 후 돈 용교위(敦勇校尉)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들은 제천 송학·금 성에세거하면서제천파라하여세계를이어오고있다. 호군공의 차남 서(墅)는 진용교위(進勇校尉)를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은 금성, 청풍지역에 세거하면서 청풍파고 불린 다.호군공의삼남증은무후이고딸은익재이재현의7세손인 이타에게출가하였다. ▲ 제 천 파 제천파는 돈용교위를 지낸 휘 질( 풔)을 파조로 한다. 그의 아들 언성(彦誠)의 자(字)는 화보(和甫)이고 중종조 때 충좌 위 부사직(副司直)을 지냈으며, 퇴계 이황 선생이 고을 향약 을 정하는데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아들 승종(承宗) · 계옥 (桂玉)을 두었는데 장자 승종(承宗)의 통덕랑(通德郞)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선조임금 이 몽진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있음을 보고 한탄하며 52세 에 온 식구를 데리고 왕박산으로 피해 가족을 온전히 구했다. 특히그는언행에신중함을보여일세의사표가되기도했다. 통덕랑공(휘 승종)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장자 세헌(世 獻)은 무후(无后)이고, 차자 충헌(忠獻)은 28세에 아버지 통 덕랑공을 따라 왕박산에 은둔하면서 아버지를 지극히 보좌하 였으며 봉직랑 영릉참봉이다. 봉직랑공(휘 충헌)의 아들 숭검 (崇儉)은 조부의 상에 아버지 통덕랑공께서 지극히 슬픔을 다 하며 시묘함에 병을 얻어 10리길을 마다 않고 매일 극한과 폭 염,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풍이 불어도 이에 굴하지 않고 찾아 가혼신을다해아버지를도와향당(鄕黨)의칭찬이 자자했다. 그는 아들 양신(良臣)븡양필(良弼)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양신(良臣)은 구재 선생에게 찾아가 낮이나 밤이나 글공부를 하여 중용 대학 주역 등 경서를 두루 읽어 학문이 뛰어났으며, 천문지리에 밝았다. 특히 몸가짐에 있어 자기를 낮추고 뛰어 난학문을숨기는소학정신을이었다. 만년에 학문을 접고 무과를 보아 등재하여 우암 선생 문하 출입하였으며, 이렇다할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였는데 1694 (甲戌) 벼슬길에 올라 안의 첨사, 통훈대부 훈련원 판관을 지 냈는데 당시 나이 60여세이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 와 그동안의 소회를 담은 시를 지어 남겼다. 차자 양필(良弼) 은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이다. 셋째문헌은행실이돈독하고모범을보여향당에서칭송이 자자했으며, 아버지 통덕랑공(휘 승종)의 하세(下世)에 정신 을 잃을 정도로 슬픔을 다했다. 임진왜란에 13세의 나이로 아 버지를 따라 왕박산으로 피했으며, 병자호란을 당해서는 당 시 나이 57세에 뷺진실로 이것은 국가운명의 불행이요 생민들 의슬픔뷻이라며탄식했다. 그의 아들 경심(景諶)은 본성이 강하고 행의가 독실하여 향 당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병자호란에 가솔을 데리고 피난 갔 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소회를 피력한 시를 남겼으며, 아들 수검이 귀(貴)하게 됨으로써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 참찬관에추증되었다. 경심의 아들 수검의 호는 임호(林湖) 온후하고 소박(素朴) 정직(正直)하여 평소 생활할 때에는 뜻이 깊으므로 헤아리기 어려워 옳고 그름을 심히 따지지 않은 것 같으나 어떤일에 임 하면 올바른 이치로써 처리하기를 칼로 자른 듯이 분명하게 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뛰어나 고을에서 존경하는 바가 되 었다. 일찍이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의 문하에서 문장과 글씨를 배워 서체에 뛰어나 교유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으 나이를거절하고탄식하며말하기를“이는다만기늘일뿐이 요 대장부가 끝까지 연구할 일이 아니라”하였다.우암 송시열 에게 수학하여 현종 때 문과에 올랐으며, 숙종 15년(1689) 기 사환국(己巳換局)으로 스승이 유배를 가 화를 당하고 왕비를 폐위시켜 축출하는 등 인륜을 폐하는 일을 스스로 자행하는 것을더욱분하게여겨제천의임호(林湖)에물러나와은거하 면서세상과출입을끊었다. 1694년(甲戌)에 다시 폐비 민씨를 복위케 할 때 이르러 비 로소 조정에 나아가 부임하는 곳에 구애받지 않고 왕명을 따 르니 유림의 논란이 많았으나 일을 처리하는 재능이 능숙하 고 지모가 훌륭히 배어나며 기골이 장대하여 도량이 넓고 여 유가 있었다. 성균관의 학록, 학정, 전적 겸 남학교수와 예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을 지내고 호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외 직으로는 무장·정천의 두 현감과 안주판관, 괴신군수를 지냈 고, 양산군수와 진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 았다. 예빈시정, 시강원필선, 좌우통례, 성균관 사예 등을 역 임하였고, 이조참판,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를 좌승지에 추증케 했다. 종질 양신(良臣)과 같이 이름을 크게 떨쳤다. 임호공은 아들 양욱(良旭), 양후(良후), 양한(良漢), 양원 (良元) 등 4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양욱은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되었고,차자 양후 (良 )의호는무은(霧隱)으로아버지임호공의임지에서 태어 났다. 천성이 순효하고 인자하고 어버이 섬김에 정성을 다했 다.수암(遂庵)권상하(權尙夏)선생문하에제자가되어많은 책에 머리를 쏟고 많은 시간을 보내 학문과 덕행이 높았던 학 자로문중을빛냈다.셋째양한(良漢)은이인좌의난에의병을 일으켜공헌하고분무훈록에그기록이전해진다. 의흥박씨는 충북 제천을 중심으로 세거한다.시조 병부상서 을규공이조선개국과함께소백산자락춘성군차의동(현단 양 영춘 별방 만종 근처)에 은거하게 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 란에송학면무도2리왕박산에피난한기록이전해진다. 호군공(護軍公, 휘 지홍)의 장자 휘 질븡서 형제분이 제천시 송학,금성에 모여 살면서 장자인 휘 질 은 큰집으로 제천파라 하 고 , 차 자 서 의 자 손 은 작은집으로 청풍파라 하며 제천에서 600여년의세거지를이룬다. 개성왕씨의 후예인 의흥박씨는 조선초 성씨 말살에 가까운 박해를 당하면서 외가의 성으로 개성(改姓)하지 않을 수 없 다. 조선 세종이후 출사하였으나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은 영 달(榮達)을 꾀하지 않았으며, 당대의 거유 낙정 조석윤, 수암 권상하, 우암 송시열 선생의 뛰어난 학문이 이어지면서 지역 사림들의추앙을받아왔다. 충북 제천 송학면 무도2리 음지만지실 뒷산아래 숨어들어 이후 그 산 이름을 왕박산이라 하여 600여년의 세거지지로 정 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이에 제천의 의흥 박씨를 지역에서 는 왕 박씨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구산박씨의 후예인 대구경 북 지역의 의흥박씨와는 그 계통을 달리하고 있으나 전국적 인통계조사에는같은성(姓)으로조사되고있다. 뱚관향조약사 의흥박씨(義興朴氏) 시조이하 3세제단(충북 제천시장락동탑내) 임호박수검선생자랑비(시비),제천시모산동솔밭공원(임호선생의 시2수가새겨져있다.) ‘무료해서 우근태(于勤台)에 올랐더니/ 우근당(于勤堂)은 간곳 없이 푸른 못만 출렁이네/ 물깊은호심(湖心)에는용(龍)이 누었고/ 늙은소나무가지에는학(鶴)이 깃들었네/ 국화꽃 그늘에술한잔들고/낙어시(落漁詩)공산(空山)만 바라보네/좋은날에는가(可)히산수(山 水)가아까워/달을노래하다돌아갈길늦었네(의림지의아름다운풍광을노래한 듯하다) 의흥박씨는 밀성대군 후 의흥박씨와 개성왕씨의 의 흥박씨가 있다.밀성대군 15世孫인 휘 석보(碩輔 ,初 諱:朴횡)께서 조선개국에 공헌하여 태조원년(서기1 392년)대광보국숭록대부 겸 영의정 벼슬에 오르고, 고려 창왕2년 (1389년)에는 형 정국군(휘 위)와 함께 대마도 정벌에 공헌하였고, 태조5년(丙子,1396년)에 公께서대마도정벌을주도하여또다시공헌하여구 산군(龜山君)에 봉군되면서 의흥군의 하리,중리,파 립,우보 등을 식읍(食邑)으로 하사 받아 후손들이 밀 성에서 구산으로 분관한 이후 지명 의흥을 따 일부 후손들이의흥으로사용하고있다. 개성왕씨의 의흥박씨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 됨에따라왕씨의대대적인숙청또는말살정책을피 해외가의성과본을따라의흥박씨로개명한왕을규 의후손이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1,046가구 3,395명이 거 주한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군위군을 거점으로 하는 의흥박씨가 군위와 대구지역에 191가구 609명이 거 주하고충북제천을중심으로한충북에228가구745 명이거주하고있는데일부성씨문화를연구하는분 들은대구경북지역의흥박씨또한개성왕씨의흥박 씨로분류하는분들이다분하여이번호에는충북제 천을 중심으로 세거하는 개성왕씨의 후예 의흥박씨 를소개해본다. 뱚본관의연원 뱚고려의멸망과개성왕씨 뱚의흥박씨세계(世系) 뱚집성촌 뱚맺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