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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8월31일 월요일 6 (제164호) 기 획 영동정공파의 역사는 이존록(彛尊錄)에 근거한다. 이존록 은 영동정공의 7世孫 휘 홍신(弘信)의 외손자인 점필재 김종 직 선생이 지은 아버지의 전기로 부록에 외조사재감정박공전 (外祖司宰監正朴公傳))과 어머니 행적, 선비박영인행장(先 삽朴令人行狀)에서 외조부의 7대조 영동정공(휘 원광)까지 의 선계(先係)를 기록한 내용을 근거로 하여 1741년 편찬한 신유대보에 밀양박씨 12중조의 한 분으로 영동정공을 중시조 로 기록하였다.영동정공은위의장군(威毅將軍)을 지낸 휘 영 년(永年)공과부인밀양손씨사이에서태어나문과에올라영 동정(令同正)에이르렀다. 영동정공은 슬하에 휘 문저(文底)와 휘 기봉(奇鳳)을 두었 는데, 장남 문저는 원릉직(原陵直)이고, 차남 기봉(奇鳳)은 보승오위(保勝五尉)인데오승보위후손들은밀직부사공파의 세계를잇고있다. 영동정공의 6世孫천경(天卿)은 고려조 삼사좌윤으로 조선 조에가선대부공조참판에증직되었다.좌윤공은슬하에언충 (彦忠)과 ·홍신(弘信)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언충(彦忠)은 1 361년 태어나 고려 말 동래성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쳐 성(城) 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워 위명(威名)을 떨치었고,세종원년 1 419년 대마도 정벌에 아우 감정공과 중군,좌군병마사로 참전 공을 세웠으나, 아우 홍신은 순국하였다. 세종 5년 62세에 가 선대부 경상도 좌도도절제사에 오르고 이후에 도총제를 역임 하고치사(致仕)하였다. 븮문종실록 2권븯 문종 즉위년 1450년 7월 28일 경오 1번째 기 사 ‘나이가 연만하여 귀로한 자에게 달마다 음식물을 내리도 록하다.’에서는다음과같이기록한다. 븮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뷺나이 많은 사람을 존대하 는 것은 고금의통한 의리이다. 전 제학(提學) 윤상(尹祥)과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박언충(朴彦忠)·전 참판(參判) 노귀상(盧 龜祥)·전 중추(中樞) 전흥(田興)·전 부윤(府尹) 유한(柳漢)이 모두 나이가 찼으므로 치사(致仕)하고, 시골에 돌아가 만년을 보내고 있으니,그도의감사에게 하유하여소재지의수령으로 하 여금 백 세 노 인 의 예 와 같 이 달 마 다 식 물 ( 食 物 )을 보 내게 하 되,매양 사맹삭(四孟朔)574)을 당하여보고하여시행하고,이 제부터 만일 당상관(堂上官)이 연만(年滿)하여 귀로(歸老)한 자가있으면,또한이예에의하여시행하라뷻하였다. 』 총제공은70세가넘어서도말타고사냥하기를좋아했으며, 향수97세(1457년)에 영면하였다.부인은 밀양박씨 규정공(規 正公)현(鉉)의 손녀이다.아들은 독자인데 휘 눌(訥)이다.숭 정대부 지중추에 올랐고, 무오사화를 겪으면서 행적이 유실 되었다. 딸이 둘이 있는데 장녀는 정존(鄭存)에게, 차녀는 변 계량(卞季良)에게출가하였다. 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 인물 편’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 어 있 다 . 븮박언충(朴彦忠) 고려 말에 왕복명(王福命)과 왜구 를 격파하고 동래성(東萊城)을 회복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호조 참의를 지냈고, 지방에 나가서 경상좌도 도절제사(慶尙 左道都節制使)가 되었다. 나이 97세에 죽었다. 사위 변계량 (卞季良)의 자(字)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 나이 17세에 과 거에 급제하고, 벼슬은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 事)에이르렀다.세자의스승이며20여년동안대제학을지냈 고, 사대교린(事大交隣)하는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시호는문숙(文肅)이고,춘정집(春亭集)이있다.븯 총제공의 아우 감정공 휘 홍신(弘信)은 1419년 대마도 정벌 에 좌군 병마사로 참전하여 이망군(尼忘郡) 전투에서 순직하 는데 그 사실이 븮세종실록 4권븯,세종 1년 6월 29일 임인 3번째 기사 ‘이로군의 접전에서 박실이 많은 군사를 잃었으나 마침 내적이물러나수호를빌다.’에전해져옮겨본다. 븮이종무 등이 배를 두지포(豆知浦)에 머무르게 하고 날마다 편장을 보내어 육지에 내려 수색하여잡고, 다시 그 가옥 68호 와배15척을불사르고,도적9급(級)을베고,중국인남녀15명 과 본 국 인 8 명 을 얻 었 다 . 적 이 밤 낮 으 로 우 리 군 사 막 기 를 생 각 하므로, 26일에 종무가 전진하여, 이로군(尼老郡)에 이르러 3 군에 명령하여,길을 나누어 육지에 내려,한 번 싸우고자 좌우 군사들을 독려하여먼저 하륙케 하니,좌군 절제사 박실(朴實) 이 적과 서로 만났다.적이 험한 곳에 모여복병하고 기다렸다 가 , 박 실 이 군 사 를 거 느 리 고 높 은 곳 에 올 라 싸 우 려 할 그 순 간 에,졸지에복병이일어나앞으로돌격해와서,우리군사가패 전하여, 편장 박홍신(朴弘信)·박무양(朴茂陽)·김해(金該)·김 희(金熹)들이 전사하였으므로, 박실이 군사를 거두어 다시 배 에오르니,적이추격하여왔다.-이하생략- 』 감정공은 슬하에 아들은 없고, 외동딸이 있었는데 강호 김 숙자(金淑滋)선생에게 출가하였다.슬하에 3남 2녀를두었는 데, 막내아들이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다. 선생은 1431(세종 1 3)∼1492(성종 23)년 간에 생존했던 인물로 조선 성리학의 종 사(宗師)였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 꿍)·계온(季 종), 호는 점필재이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 선생이 부관참시 를 당하자, 인척들은 경남 고령과 거창으로 피신하였고, 총제 공의 후손들은 함안의 두메산골 여항으로 피신하여 그 후로 부터함안을중심으로하여뿌리를내리게되었다. 총제공의 증손자 대(代)에 휘 경원(景元)과 휘 경현(景玄) 을 중심으로 만호공(萬戶公)과 참군공( 핫軍公) 문중으로 구 분한다. 만호공 휘 경원은 옥포, 합포 만호를 지냈으며, ‘무오사화’ 때 아우 참군공과 밀양 구령리에서 함안 여항 두릉촌으로 이 거하여 은거하게 되면서 그 후 후손들이 함안을 중심으로 하 여 낙동강 우측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아들 건문(建 文)은 세조 경진년(1460)에 무과에 급제하고 1466년에 치러 진 발영시(拔英試)와 준시(俊試)에 병과에 선발되어 훈련원 도정에 이르렀다. 천성이 호협하고 절조가 강하여 권세에 아 부하지 아니했다.어렸을적 동무인좌의정어세겸(魚世謙)이 고 향 에 돌 아 오 면 공 을 찾 아 손 을 잡 고 서 로 격 의 없 이 지 내 며 옛날과 다름없이지위의고하를 떠나 주연(酒宴)을 함께했다. 연산조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으며 이하 후손들은 산촌에서 주유(周遊)하며 학문을 탐구하고 정도에 어긋남이 없는 삶을 이어갔다. 참군공 휘 경현은 국자진사(國子進士)가 되었다가 세조 경 진년(1460)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참군이 되었는데 무오사 화를 모면하기 위해 형님 만호공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함안 으로 피신하였다. 아들 휘 여달(如達)은 징사(徵士), 연산조 때 유일(遺逸)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혼조(昏朝)의 정사가 그릇됨을 알고 조명(朝命)에 응하지 아니하고 숨은 덕행으로 임야에서종신하였다. 참군공의 손자 휘 류(榴)는 1522년 무과에 급제하여 보령, 옥구, 무안 현감을 역임하고 기로(耆老)에 올라 가선대부 공 조참판에가자되었다.부인은함안이씨대사헌을지낸이인형 (李仁亨)의 따님으로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를 모시고 홀로 된시누이와함께서로경애(敬愛)하며종신토록화목하게지 내그기록이함주지(咸州誌에전한다.아들둘을두었는데장 자 윤수(允秀)는 사헌부 감찰이고, 차남 종수(宗秀)는 손자 무숙공(휘진영)의귀(貴)로한성부우윤에추증되었다. 현감공의 아들 휘 윤수는 15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공의 유적이 한강 정구 선생이 편찬한 함주지 (咸州誌)에 전한다.부인 순흥안씨는 취우정 안관(安灌)의 따 님이다. 감찰공의 외손 매죽헌 이명호 선생의 연보에 의하면 선생 7세에 외조부 상(喪)을 당하여 슬퍼하고 상심함을 지극 히 하여 훈채(파 마늘처럼 특이한 냄새가 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다. 모부인이 그 나이 어린 것을 불쌍하게 여겨 소반(素 飯)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기를 제가 만약 고기를 먹는다면 누가 다시 예법을 지키겠습니까? 라고 하니 모부인이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억지로 권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아들 삼형제를 두었으니 장자는 현(晛), 차자는 고(暠), 셋째는 희(曦)이다. 차자 휘 고(暠)는 임란 때 경북 청도군으로 피신하여 그 후로 한재에 뿌리를 내 리게 되었다. 장녀는 성산인 황곡 이칭에게 출가하였다. 이칭 은 남명 조식,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에 창의 하였다. 차녀는 함안인 조신도(趙信道)와 혼인 했으니, 조신도는 생 육신 어계 조려의 5세손으로 무과에 급제 온양 군수를 지냈 고, 임란 때 호성공신 1등, 선무공신으로 병조참판에 증직되 었다. 현감공의 차자 종수(宗秀,)는 아들 오(旿)와 남( 도)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오(旿)의 號는 동천(桐川)으로 소시적에거제 에 유 배 온 유 헌 정 황 선 생 에 게 배 워 재 예 (才 藝 )가 일 찍 완 성 되었고, 나중에 구암 이정(李楨) 선생에게서 배워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사우(師友)들로부터 추앙 받았다. 1592년 4월 임 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義兵)을 모아 아들 진영(震英)에게 의병을 이끌게 하여 김해성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치도록 하 고, 자신은 단성현(丹城縣, 경남 산청군 단성면)으로 가서 현 감 조종도(趙宗道)선생과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우다 1594년 전란중에 작고하였다.부인은재령이씨이경성(李景成)의 따 님으로 처남 모촌 이정(李瀞), 갈촌 이숙(李潚) 형제는 임란 때창의하여공을세웠다. 동천공의 아들 진영(震英)의 호는 광서(匡西),시호는 무숙 (武肅)이며, 1569년 함안 가야 검암촌에서 출생하였다. 어려 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외숙부 모촌 이정, 종 고모부 황곡 이칭,수우당 최영경,황암 박제인 선생 등으로부 터 배워 약관 이전에 학문적 토대가 형성되었고,작은 외숙 갈 촌이숙장군으로부터무예(武藝)를닦았다. 청년기에 독서(讀書)라는 오언절구를 지어 입지(立志)를 세웠다. 븮問學凉非遠(문학량비원) 학문은 진실로 멀지 않나니/ 何 須別義尋(하수별의심) 무엇하러 다른 뜻을 찾으리./ 當忠當 孝地(당충당효지) 충성하고 효도할 곳 만나면/隨遇盡吾心 (수우진오심)그때마다내마음다하리.븯 광서공은 19세(歲)때 한강 정구(鄭逑)선생이 함안 군수 재 임 시, 관내 유생들을 대상으로 강회(講會)를 열었는데, 직접 나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한강 선생이 시험해 보고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예견하였다. 24세(歲)때 창원 광산사(匡山 寺)에서 독서 중 아버님과 창의(倡義)하여 1592년 4월 18일 의병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항전하였으나 중과 부적으로 성(誠)이 함락되어 구사일생으로 함안으로 돌아와 망우당 곽재우 장군 진영에 잠시 머물다 함안 군수 유숭인과 재차 의병을 모아 1594년 6월 5일 당항포 해전에서 패한 왜적 들이 의령을 거쳐 전라도로 진격하기 위해 함안의 경계를 침 범하자 왜적들을 물리치고 함안을 사수하였다. 이때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적을 맞아 싸웠는데, 물친 적이 매우 많았다. 승세를 타고서 북쪽으로 적을 쫓아가 50리쯤에 이르러 그제야 비로소 피가 흘러 발목까지 적시고 총탄이 오른쪽 옆구리를 뚫고 지나갔음을 깨달았다. 많은 사 람들이놀라탄복하였다고한다. 전투후에감회를읊은칠언절구‘격왜피상’을지었다. 븮雲長割骨是男兒(운장할골시남아) 뼈를 깎아낸 관운장은 진정 남아로다./ 我亦中丸穿脅皮(아역중환천협피) 나 또한 탄환이 옆구리를 뚫었네./ 獨有忠肝有不碎(독유충간유불쇄) 충정만은 여전히 부서지지 않았으니,/ 此身雖死氣驅馳(차신 수사기구치)이몸이죽더라도기개는달려가리.븯 뱚12중조 약사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 청금재전경,경남함안군산인면내인리①무숙공부조묘 ②유물전시관 ③청금재.영동정공이하 17世까지제향을받드는곳이 다 뱚 ▶7면으로계속 영동정공파는 밀성대군의 12世孫, 고려조 영동정 (令同正) 휘 원광(元光, 시조 41世孫)을 파조로 하 고, 경남 함안을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으며, 조선 초(初)7世孫 도총제공휘 언충(彦忠)과 아우 사재 감정공휘홍신(弘信)형제대(代)에문중의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조선 중기 15世孫 무숙공 (武肅公)휘 진영(震英:임란 의병장)공이 충의열사 반열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조선 말(末) 퇴계학맥 의대학자23世孫만성공(晩醒公)휘치복(致馥)은 문중의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남기어 오늘 날 까지 선조들의 미행(美行) 자랑스럽게 간직하 고있다.1498년‘무오사화’때총제공의증손자대 (代)에 함안으로 은거한 후로 함안이씨,함종어씨. 함안조씨, 순흥안씨, 성산이씨, 현풍곽씨 등 지역 유력 집안과 혼맥을 통해 기반을 닦아왔다. 특히 총제공의 사위는 춘정 변계량(卞季良)이고, 사재 감정공의사위는강호김숙자(金叔滋)선생으로외 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등걸출한 인물이 태어 나처가와,외가의가문을빛냈으며,점필재선생은 이존록(彛尊錄)에 외조부의행장을 기록하여영동 정공파의세계를명확히밝히고있어소개해본다. 뱚 ■영동정공파연원 뱚 ■영동정공파 세계(世系) 뱚▶만호공(萬戶公)系 뱚▶참군공( 핫戶公)系 화산재(경남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참봉공(휘 여달)이하 선조의 재사 (齋舍) 무숙공부조묘,청금재경내. 동천·무숙공부자(父子)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