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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일제 점령기 농구공 하나로 오만한 일본을 제압하더니...「부당한 승리보다는 떳떳한 패배를」 「지도자는 기술보다 교양과 인격을」 되 뇌이던 아버지 韓山(한산) 李 性字(이 성자) 求 字(구 자)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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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구는 충청남도 천안 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8년 YMCA에서 농구를 시작해서 1930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현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여 농구부를 창설하고 주장 선수로 활약하였다. 1933년 대학 졸업 후 조선농구협회 이사로서 활동하였으며, 1934년에는 진명여자고등학교 체육교사가 되어 이후 10년간 재직하였다. 1936년에는 전일본농구선수권대회를 제패하여 국가대표가 되었으며, 장이진(張利鎭)ㆍ염은현(簾殷鉉) 등과 함께 베를린올림픽에 일본 국가대표선수로 출전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통계처장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한국은행과 대한중석 등에서도 근무하였다. 이후 대한농구협회 재건 주도 회장 직무대행 겸 이사장으로서 광복된 조국의 농구협회 재건을 주도하였다. 1948년 런던올림픽대회에 농구팀 감독으로 참가한 이후, 올림픽대회에 대표단 임원으로 6차례나 참가했으며, 아시아경기대회 농구팀 감독(1954년), 아시아경기대회 선수단 총감독(1958년), 유니버시아드대회 등에 모두 7회에 걸쳐 참가하였고, 정상윤(丁相允)과 함께 대표팀을 지도하는 농구의 기술적인 뼈대를 완성했다. 또한 연세체육회를 창립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대한체육회 이사,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 대한체육회 코치아카데미 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대한대학스포츠위원회(KUSB) 창설의 주역을 담당했다. 아시아농구연맹(ABC) 창립을 주도하여 부회장(1958)에 피선되었고, 1982년 체육부가 탄생하면서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84년 농구코치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활동했다. 1986년 연세농구부 주최로 스포츠전시회(사진전)를 개최하였고, 1998년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총재에 취임했으며, 서울 YMCA 체육교육위원으로 활동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