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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5월31일 일요일 6 (제161호) 특집 산청군은 조선시대 산음현과 단성현의 통합으로 구성된 경 상남도의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부는 합천군과 의령군에, 서 부는 함양군과 하동군에, 남부는 진주시에, 북부는 거창군에 각각 인접하였는데 그 규모는 동서가 38.8㎞, 남북 40.3㎞로서 주위는 대부분이 준험한 산령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특히, 서 부는 천왕봉을 기점으로 한 지리산맥이 남·북으로 질주하여 하동, 함양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합천군과는 황매산이 양군 의분수령을형성하고있다. 신등면은유구한역사와아름다운자연환경을가지고,청정 농산물이 생산되는 지역으로,단계한옥단지를 비롯한 이충무 공유적지, 장승배기생태공원, 물방아재공원 등이 있고 자연 경관이수려하며선현도학자가많이배출된고장이다. 천년고찰 율곡사 보물 제374호 대웅전과 보물 제1316호인 괘불탱 그리고 정취암과 단계리 박씨고가, 권씨고가 등의 문 화재와 단계마을의 아름다운 옛 돌담장 등 많은 문화유산이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박씨 산청군종친회는 전국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활력이 넘쳐나는 모범적인 종친회로 거듭나고 있 다. 신등면 단계마을은 신등면의 소재지로 경찰관 파출소, 학 교, 시장 등이 있으며, 박씨고가가 즐비해 전통한옥마을로 거 듭나고있다.이곳단계마을에는순천박씨판윤공의후손으로 용담공(휘이장)후손과주부공(휘 신손)의후손들이각기 시 기를 달리하여 입향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단계마을의 용담 공 후손의 입향는 1700년 초 경북 고령군 운수면 승리(승사 동)에서 영조조에 용담공의 현손 홍원(弘遠)의 부인 안동권 씨가 친정인 단계리로 아들 상제(尙悌)를 데리고 이거해 왔 다. 안동권씨는 충강공 동계 권도(權濤, 조선중기 문신, 1575 -1644) 선생의 증손녀이고, 선교랑 권두흥(權斗興)의 따님으 로 훌륭한 가풍의 법도를 배워 덕행이 뛰어난 순천박씨 휘 홍 원(弘遠)에게 시집왔으나 불행하게도 남편이 31세에 조졸하 고 남편의 형(휘 수원) 또한 23세에 조졸하고 그의 아들들이 어린나이에 홍역으로 죽자 맏동서인 해주정씨(휘 수원의 처) 가 1 7 0 8 년 자 결 하 는 등 상 란 (喪 亂 ) 이 계 속 되 어 어 린 아 들 과 함께 친정마을로 이거하여 지난 2017년 11월 이거 300주년을 맞았으며,현재1,000여명의후손으로크게번성하게되었다. 또 다 른 후 손 은 판 윤 공 후 주 부 공 휘 신 손 (信 孫 ) 의 현 손 모 와공 휘 자우(子羽)의 10世 휘 해곤(海鯤)이 1900년초 고령군 운수면 법리에서 이거했다. 구전에 의하면 윗대 어른들이 같 은 지역에서 거주하며 왕래를 하였고, 산청으로 이거하여 크 게 번성하게 되자 고령지역보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단계마 을로 이거하여 용담공의 후손들과 상부상조하며 혈육의 정을 나누고있다. 단계마을의 입향조는 순천박씨 판윤공 후 용담공의 6世이 다. 고려 말 개성판윤(開城判尹)으로 고려가 기울고 조선이 개국하자 경북 성주군 가야산에 은거하며 불사이군(不事二 君)의 충절을 지킨 휘 가권(可權)으로부터 판윤공파의 문호 가열린다. 상계를 보면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한 휘 숙정(淑貞)은 증조 부가 되고 조부는 익재 이재현 선생과 근재 안축 선생 등 당 대의 거유와 종유(從遊)하고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라 청 렴고결하고모든일에있어공평하게처리하였던휘원룡(元 龍)이고, 무과에 급제하여 도첨의시중에 오르고 평양부원군 (平陽府院君)에 봉해진 휘 천상(天祥)은 아버지이다. 평양부 원군의 첫번째부인 원주원씨(原州元氏)는 성안부원군(成安 府院君) 원호(元顥)의 따님이며, 그의 외조부는 복안부원군 (福安府院君) 권겸(權謙)이다. 후배(後配) 성산이씨(星山李 氏)는 경원공(敬元公) 포(褒)의 따님이자 정당문학의 대가 이조년선생의손녀이다. 판윤공은기질이아름답고뜻이높았으며 학문이뛰어나명 망을 높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청직(淸職)을 두루 거치면서 몸가짐을 조심하고 확고하게 하여 시배(時輩)들과 절대 어울 리지 않았으며 개성판윤(開城判尹)에 올랐는데 공의 관직을 따판윤공파라한다. 판윤공은 슬하에 2남(유성, 두성)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유 성은의주목사공파,차남두성은진사공파로세계를이룬다. 장남 유성(柳星)은 태종 9년(1409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 부터 기질이 특이하고 문무겸전의 재주가 탁월하여 판윤공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지않았으나판윤공의유훈을받들어출사하였다.종성 부사(鍾城府使, 현 함경북도 종성군)로 나아가 공평청렴하고 자애로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은 공덕비를 세워 은혜와 공 덕을 칭송하였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그 행색(行 色)이 너무도 소연(蕭然)하여 임금이 그 청렴함을 가상히 여 기어 청백리로 봉하여 단서(丹書)를 내리고 의주목사를 제수 하니 더욱 엄하고 튼튼하게 변방을 방비하고 위민선정(爲民 善政)을 베풀었다.이후 황해도 절도사로 부임도중 병이나 48 세를일기로별세하였다. 목사공은 인손(仁孫),예손(禮孫),신손(信孫)삼형제를 두 었는데, 장남 인손은 승사랑(承仕郞)으로 효우(孝友)가 돈독 하고 재덕을 겸비하였고,차남 예손은 어모장군충무위부사맹 으로 타고난 효자이다. 부모님 상을 당해 피를 토하듯 슬퍼하 며 3년 상을 치르고 1495년 합천 야로 숭산 남교(현 야로면 매 안리)로 이거하여 아들과 사위(한훤당 김굉필)의 학업을 위 해 숭산(현 매안리 989번지)에 소학당(小學堂)을 건립, 이들 에게학문의대성을이루게하였다. 삼남 신손의 호는 모헌(慕軒)으로 상서원주부(尙瑞院主 簿)이다. 4세 때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효(孝) 자(字)의 뜻 을 묻는 등 천성으로 효(孝)가 지극하였다. 아버지 목사공과 모부인 정부인 수주김씨가 병석에 누워 위독할 때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드시게 한 후 10여 일을 연명하게 하는 대효 (大孝)로 향리의 칭송을 받아 관찰사는 그를 효렴(孝廉)으로 아뢰어주부(主簿)를제수하였다.특히학문이깊어만년에는 경북군위의흥이전동에살면서시주(詩酒)를즐기다가여생 을마쳤다.목사공 후손들은장남은 승사랑공파(伯派)차남은 사맹공파(仲派), 삼남은 주부공파(季派)로 각각 세계를 이루 고 있 다 . 사맹공파는 목사공의 차남 휘 예손(禮孫)으로 단계입향조 의 9대조가 된다.사맹공의 아들 한하(漢河)는 통정대부 사복 시정에증직되었다.합천의소학당에서수학하여문장과덕망 이 높았으며, 그는 아들 4형제(식, 우, 돈, 지)를 두었는데 장 남 식(埴)은 진사(進士)시에 올라 경릉(敬陵) 참봉(덕종과 소혜왕후의 능)을 지내고 손자 용담공(휘 이장)의 귀(貴)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고, 아들 양좌(良佐)의 호(號)는 복재(復齋)이다. 1540년 진사가 되고, 조선 태조 이 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경기전 참봉으로 학문과 덕행이 높았 으며 두 아들(이문, 이장)을 두었는데 차남 이장의 귀(貴)로 이조참판홍문관제학겸세자좌부빈객에증직되었다. 복재공(휘 양좌)의 장남 이문(而文)의 호는 남계(藍溪),15 44년(종중39)에 태어나 뛰어난 학문으로 1568년 진사시에 합 격하였고, 한강 정구 선생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지극히 효성 스러워 아버지 복재공이 병을 앓자 옷을 벗지 않고 주야로 뫼 시면서 간호를 하며 동생 용담공(휘 이장)에게 뷺부모님이 늙 으셨으니 벼슬은 네가 하고 나는 부모님 봉양을 맡겠다뷻고 한 후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성의를 다하여 부모를 섬기므로 조 정에서는 그의 효성을 듣고 경릉참봉을 제수하였으며, 임진 왜란에는 분연히 일어나 망우당 곽재우의 진영에 있으면서 군량을 조달하였는데 이때 학봉 김성일의 파직이 부당함을 열읍(列邑) 선비들과 함께 상소하여 이를 막아내고, 낙동강 이서지역 방위에 힘써 망우당과 학봉은 늘 그의 충절을 칭찬 하였으며,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어 후손들은 남 계공파로합천지역에거주한다. 복재공(휘 양좌)의 차남 이장(而章)은 입향조의 5대조로 호는 용담(龍潭), 1547년에 태어나 1573년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기자전(箕子殿)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관혼촬요(冠婚撮要)]를 지었다. 1586년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제수 받았다. 한림(翰林)으로 있을 때 선조(宣祖)를 야대(夜對)하였는데 선조가 임금의 덕(德) 에대해서물었다. 용담은,“백성의고락(苦樂)은임금의덕에달려 있는데,덕 이란 것은 마음의 도리를 갖추는 것입니다. 사욕이 그 도리를 덮어 버릴 수 있으니, 항상 존양(存養) 성찰하는 노력이 없으 면 마음의 도리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성(誠)과 경(敬)의 요점을 이야기 했고, 성색(聲色)과 교일 (驕佚)에 대한 경계와 간사한 인간들이 임금을 막는 것에 대 한 우려 등에 대해서 언급했다. 또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경(敬)과태(怠)의관계등에 대해서도상세히이야기해주었 다. 1591년 5월 하절사(賀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 라에 갔다. 당시 왜인들이 조선 조정에 글을 보냈는데, “명나 라를 징벌하러 갈 것이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라는 내용 이었다. 이런 내용을 명나라에 사실대로 알릴 것이냐 숨길 것 이냐로 조정에서 논란이 있었는데, 용담은 사실대로 왜의 사 정을 바로 알릴 것을 주장했다. 황제가 사실대로 보고한 것을 기뻐하여몇수레의서적을하사했다. 1592년 1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 지 않았다. 4월에 왜적이 대규모로 침략해오자, 창의하여 왜 적을 쳤다. 용담은 향병(鄕兵)을 모아 송암(松菴) 김면(金 沔),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등과 연합하여 왜적의 흉봉 (凶鋒)을 막아 경상도 지방을 보호하였다. 가을에는 초유사 (招鍮使) 김성일(金誠一)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군 무를 논의하였다.9월에 호남(湖南)에서군량 1천포를 가져와 경상우도 지역의 군민(軍民)들을 구제하였다. 1594년 정언 (正言)에 이어 순창부사, 수원부사, 1601년 성균관 전적(典 籍)에 제수되었다가 한 달여 만에 귀향하였다. 호성원종공신 (扈聖原從功臣),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모두 책록 되었다. 1602년 사헌부 집의에 제수된 이후로 홍문관 부응교(副應 敎),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부제학(副提學),시강원필 선(弼善), 보덕(輔德),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 承旨), 좌승지, 도승지,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이 조참의, 참판, 대호군(大護軍), 예조참판, 대사헌, 한성부(漢 城府)좌윤(左尹)등직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관혼촬요(冠婚撮要)’, ‘정서절요(程書節 要)’, ‘육경려해(六經 련海)’, ‘심경촬요(心經撮要)’, ‘상재만 록(桑梓漫錄)’ 등이 있었으나 그의 서재인 ‘모덕와’가 불타는 바람에다없어지고말았다. 후손들은 용담공파라 하여 경남 산청 신등면 단계리에 큰 집성촌을이루고용담정사가있다.고조의휘공구(高祖,용담 공의 아들)는 유일(遺逸)로 사부(師傅)에 추천되어 봉림대군 의 스승이 되었고, 병자호란에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나 받 아들여지지않자통한의심정을시문으로나타냈다.낙동강가 에집을짓고은거하며기옹(畸翁)이라자호하니세인들이절 행(節行)이있는분이라며기옹선생(畸翁先生)이라했다. 증조(曾祖) 휘 원복은 선교랑이고, 조부(祖父) 휘 성주는 참봉을지냈으며,아버지(考)의휘는수원(壽遠)으로일찍작 고하였으며,어머니(配位)해주정씨는 순열(殉烈)로 정려(旌 閭)되었다. 해주정씨의 정려 기록을 보면, 숙종26(1700년, 19 세)에 순천박공 휘 수원(壽遠)에게 출가하여 4년 후인 갑신 (甲申, 1704)에 남편이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자 정씨는 기 절했다가 다시 깨어나 자결할 뜻을 비추 자 그의 시아버지는 즉시 정씨의 마음을 일깨워 ‘네가 다행히 아들 둘을 두었는데 네 가 죽 으 면 두 아 들 을 잘 보 호 할 수 없 고 , 또 너 의 남 편 제 사 도 의탁할 수 없으니 그것이 옳은 일이겠느냐?’ 라고 하므로 정씨는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이때부터 음식을 먹기 시작 했으나 그 양이 소량에 불과했다. 계절이 바뀌어도 옷을 갈아 입지 아니하고 밤에도 침석(枕席)을 마련하지 않았으며, 머 리에 빗질도 하지 않았으나 모발이 모두 빠졌다. 그리고 조석 으로 오직손만씻고 상식(上食)을 마련하여 궤연( 누筵)앞에 나가서 슬프게 곡을 하므로 그 곡소리를 차마 들을 수가 없었 다. 이렇게 3년 상을 마치고 부모님을 뵙기 위해 근친을 갔다. 이때 정씨는 밥도 먹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아 수척한 몸은 거 의 죽을 것만 같았다.밥과 고기를 갖다 주면서 간곡히 권하자 정씨는 차마 권한 사람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밥은 먹었으 나, 고기는 먹지 않았다. 그 후 정해(丁亥,1707년)년에 친정아 버 님 이 작 고 하 고 두 아 이 들 도 홍 역 으 로 수 일 만 에 모 두 죽 으 므로 정씨는 더욱 슬퍼하며 자결을 결심하고 무자(戊子1708) 년 정월 29일 새벽에 침실로 들어가 자결하였다. 이때 가족들 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모두 놀라 그 방으로 가 보았으나 이 미 구제할 수 없었다. 이날은 죽은 남편(수원)의 제삿날이었 다.이때 정씨는 수 일 전에 제찬(祭饌)을 마련하여 집에 놔두 고 절명할 때 유서도 남기었다.대충 그 내용을 들자면 전일에 는 구차하게 살았지만 지금은 죽음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 유서는그분의시신옆에서발견했다. 갑오년(1714)에 이 사실이 대궐로 알려지자 상(上)은 그 즉 시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부인이 절명한 후에 품속에서 발 견한 시는 다음과 같다. 가련박랑삼부자 구원하처대아귀(可 憐朴郞三父子九原何處待我歸) ※이절명시는성주의주지에수록되었다.』 입향조 휘 상제(尙悌)의 생부는 참봉을 지낸 휘 성주의 삼 남 휘 홍원(弘遠)으로 31세의 나이로 조졸했다. 백부의 상란 (喪亂)으로 대를 잇기 위해 종가로 들어갔다. 公은 천성이 강 직하고 기절(氣節)이 탁월하였다. 일찍부터 흉사(凶事)를 만 나 가정의 재앙이 거듭됨에 따라 이미 백부와 숙부를 잃고 또 종 형 과 종 제 를 잃 어 항 시 의 지 할 곳 없 는 외 로 운 처 지 를 평 생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결국 과거공부도 폐지하였으며, 어머 니 안동권씨는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어 의리로써 교육을 하였으므로 엄부(嚴父)처럼 따랐다.백부(휘 壽遠)를 이을 양 자로 입양된 뒤에는 선조를 받드는 일과 손님을 접대하는 일 에서부터 모든 가사에 있어서 성의를 다하여 실천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가정 내에서도 항시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스스로법도가있었다. 판윤공(휘 가권)의 아들 목사공(휘 유성)의 셋째 휘 신손 (信孫)의 호(號)는 모헌(慕軒), 상서원 주부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문유(文儒)의 號는 요산(樂山)으로 생원이다.종형 참봉공한삼(漢參)과한원당김굉필선생에게수학하였다.15 04년(연산군10)갑자년에훈구사림파중심의부중세력이궁 중 세력에게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건인 갑자사화가 있은 후 은둔하여 불사(不仕)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주부공의 아 들 휘 붕거(鵬擧)의 호(號)는 행단(杏壇)으로 1543년 진사시 에 급제하여 성균 진사가 되어 크게 명성을 떨치고, 명종조에 요승(妖僧) 보우(普雨)가 불교를 전파하면서 거처(居處)가 참람하고막강한권력으로교만을부려화(禍)가언제미칠지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영남지방의 선비 8명과 함께 강력히 항 쟁하여 여덟 차례나 상소하였으나 승정원(承政院)에서 저지 하자 대궐문까지 가서 호소하여 결국 윤허를 받아 배척하였 다. 주부공의 손자 휘 광후(光後, 행단공의 아들), 1533년생으 로 일 찍 이 학 문 에 뜻 을 두 어 대 가 천 (大 伽 川 )에 집 한 채 를 짓 고 대나무와 잣나무를 심어 죽백당(竹柏堂)이라 하고 자호 (自號)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종질 이현(而絢, 懿愍 公)과함께의병을일으켜많은적을사살하고생포하였다.전 란은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적장이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다 시 쳐들어오자 약한 병사들은 대적할 수 없어 넘어지고 도주 하나 죽백당 만큼은 용기를 꺾지 않고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 여 요새지를 사수하였다.이렇게 3년이란 세월이 흘러 1595년 2월1일산성(山城)의전투가패배하자결국군중에서순절하 였는데, 이때 아들들(자의, 자우, 자건, 자화)은 진중으로 들 어가 그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는 효심을 발휘하였다. 죽 백당공은 이후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 었다. 죽백당공(참판공)의 차남으로 태어난 자우(子羽)의 호 (號)는 모와(慕窩)이다. 1562년에 태어나 10세 때 설봉 박찬 에게 수업하였는데 영민함을 보여 설봉 선생으로부터 매우 사랑을받아일찍이학문의대성을이루었다. 임진왜란에 종자(從子)산립(山立,형 자의의 아들)이 전사 하자 백운산성으로 달려가 그 시신을 거두어다가 장례를 치 르고 송암 김면의 막하에 머무르며 힘써 싸워 적을 토벌하였 으 나 적 병 이 습 격 해 올 때 주 장 (主 將 ) 은 병 이 들 어 사 망 하 고 군영이 허물어져 사졸(士卒)들이 흩어지므로 다시 조승훈의 군영으로 가서의지하며 토적(討賊)하였다.1652년 종자 동립 (東立)이 예조에 호소하여 중추부사의 직함이 내려지고, 후 손들은 모와공파(慕窩公派)로 세계를 잇고 있으며, 공의 10 世휘 해곤(海鯤)이 1900년초 고령군 운수면 법리에서이거했 다. 뱚집성촌탐방 경남산청군신등면단계리순천 박씨 경남산청군신등면단계마을전경. 뱚단계마을의입향 뱚입향조선원세계 용담공박이장신도비와어필비각.(경북 고령군운수면유동마을) 뱚▶7면으로계속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