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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4월30일 목요일 6 (제160호) 특집 무안박씨 관향 조 의 7 세 휘 문 오 (文 晤 ) 의 호 는 면 남(綿南)으로 벼 슬은 은청광록대 부 상주국영동평 장사이고 면성부 원군에 봉해졌으 며,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노성파 는 이중 막내아들 휘 윤류(允 )의후손이다.휘윤류公은고려충열왕16년(1 290)에 태어나 총랑(摠郞)을 지냈으며,그의 아들 의룡(義龍) 의 호는 풍정(楓亭)으로 조선조 개국공신으로 영중추부사에 올랐으며 태조실록에 뷺개국공신91인 중 수공신 조준븡남재븡김 운보븡박의룡 등에게 주니 이를 받은 사람과 후손에게는 죄가 많 아 도 연 유 를 묻 지 말 고 용 서 할 것 이 며 병 이 나 면 의 원 과 약을 보내 구호하고 부고가 오면 반드시 임석하여 같이 슬퍼 하고 부의를 극히 후 하게 하여 예로써 끝까지 장례를 마치고 공신 모두를 이 같이 하라뷻는 단서철권(丹書鐵拳)을 하사 받 았다. ( 출 처 : 태조 조 실록 전주 이 씨 동광 문중 초래) 풍정공의 아들 휘 강(綱)은 형조참판, 손자 형(亨)은 지단양군사(知丹陽郡 事), 증손 휘 이( 視)는 영덕·평강 현령 등을 역임하고 병조참 판에추증되었다. 정부인 남양홍씨 사이에서 관경(觀卿), 임경(臨卿), 익경 (益卿), 항경(恒卿), 진경(晋卿) 등 5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관경은 증손 운감(雲鑑)에 이르러 전해지지 않고,둘째 임경 의 후손들은 함양·개부·노성파로, 셋째 익경은 무안파조, 넷째 항경은 군수공파조,다섯째 진경은 경파조 각각 분파된 다. 노성파는 영덕·평강 현령 등을 역임하고 병조참판에 추증 된 휘 이와 정부인 남양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휘 임 경(臨卿)의 아들이다.휘 임경의 호는 의암(義菴)으로 숙천부 사(肅川府使, 평안남도 평원 지역의 옛 지명)를 비롯하여 여 러 고을을 두루 거쳐 황주목사를 지내고, 자헌대부 이조판서 에 추증되었으며, 부인 정부인 연안김씨와의 사에 아들 평 (坪, 함양·개부파)을 두었는데 연안김씨는 19세에 조졸하여, 매죽헌 성삼문의 딸을 후배(後配)로 맞이하여 아들 증(增), 호(壕), 헌( ) 등 삼형제를 낳으니 이들을 중심으로 노성파 (魯城派)가형성된다. 의암공(휘 임경)과 창녕성씨와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휘 증 (增 )의 자 (字 )는 익 지 (益 之 ) 호 (號 )는 암 천 (巖 川 ) 으 로 1461년(세조7)에 서울 대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 리하고 풍채가 뛰어나 강희안(1417~1464, 조선 초기의 문신· 서화가)도암천의자품이비범함을칭찬했다고한다.5~6세부 터 이미 시비에 곱고 바른 것을 판단할 줄 알아 마치 엄정하고 노숙한 대인(大人) 장자(長者)와 같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박 씨 집안의 기린(麒麟,성인이 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 고하는상상속의짐승)이라고자자하게칭송했다. 부친에게 소학 중 븮효제충신(孝悌忠信) 예의염치(禮義廉 恥)븯등을 배울 때 선생은 “효도란 자식의 도리이며 충성은 신 하의 직분인데 어찌하여 자식이 불효하고 신하가 불충합니 까?”하고 질문했다.이에 부친은 “사람들이 혹 미련하고 어리 석어 착한 본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현들은 가르치 는데 반드시 선(善)으로 인도하여 간사한테 빠지지 않게 한 다.”라고대답했다. 선생은 부친의 이 말을 죽을 때까지 새겨두고 실천하려 노 력했다. 또한 삼각산에서 글공부 하던 중 선생은 매월당 김시 습과 유숙하며 대학 븮명덕지선장(明德至善章)븯의 성의(誠 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의조목에대해강의 했다. 김시습이 “아 참으로 성인의 말씀이로다!”하고 감탄하 니, 선생은 “격물치지(格物致知,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름)가 아니면 어찌 지선(至善)에 이르며 성 의 정심이 아니면 어찌 수신제가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나의 선(善)을 밝히는 공부에만 힘쓸 뿐입니다.”했다. 김시습 은 “그대가 어린 나이에 소견이 이러하니 성취가 한량없을 것 이다.”하고 의관을 정제하고밤새 마주했다고하였다.그는 사 서(四書)를읽으면서깊고어려운뜻을반복하며연구하고주 역과춘추를즐겨읽었다. 강유괘상(剛柔,굳셈과 부드러움 卦象,길흉이 나타나는 모 양)의 뜻과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깊은 뜻을 연구하고 정 삭(正朔)을 높이고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를 미루어 밝혔다. 이 러 한 사 실 로 볼 때 선 생 의 학 식 이 얼 마 나 깊 었 는 가 를 대 력 짐작할수있다. 어떤사람이과거시험을보라고권하자선생은그저웃기만 할뿐대답하지않았다.이미관직에뜻이없었기때문이었다. 외조부인 성삼문이 병자년에 화를 당해 돌아가시자 사위인 선생의 부친은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서호(西湖)·노량진 (露梁津)에 매장한 뒤에 두문불출 하였다. 그 뒤 화병(火病) 을 얻어 1480년 경에 돌아가셨으며, 어머니는 시집온 지 1~2 년 만에 친정아버지를 여의고 친정어머니가 노비로 끌려가는 등 친정이 몰락하자 눈물로 일생을 마쳤다. 상을 당해서는 상 중의 제례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 에 강호에 묻힐 생각으로 전국을 배회하다가 계룡산 근처 노 성(魯城)의동쪽바우내로와서은거하였다. 강호 자연과 함께한 선생은 말년에 자손들에게 유훈(遺訓) 하기를“나는이미버림받은사람이되었다.우리큰집의경우 조카가 제사를 주관 할 것이며 외조부 성삼문공의 경우 참찬 (參贊)호(壕)가주관했는데 아직도 후사가 없으니훗날일은 응당너희들에게달려있다.너희들은유념하여외할아버지의 제사를끊어지지 않도록 하라.뜻을 지킴에는충정(忠貞)으로 업을 삼을 것이며 벼슬에는 무릅쓰고 나아가는 것을 경계하 라.”했다. 선생은 일생을 처사로 살다가 1517년(중종12)세상을 떴다. 선생의 부인 재령정씨는 선생보다 아홉 살 아래였는데, 가시 비녀에 베옷을 걸치고 가난한 살림에도 아무런 불평이 없었 다. 그때 사람들이 양홍(梁鴻)의 아내 맹광(孟光)의 부덕에 비유했다. 선생의 유훈으로 후손들은 성삼문에 대한 봉사(奉祀)를 게 을리 하지 않았으며 선생의 7대손까지 200여 년 동안 지속 되 었다고한다. 1622년(광해14) 통정대부 형조참의에 추증되고, 5년 뒤인 1627년(인조5)에는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또한 1805년(순조5)에 지역의 유림들이 이웃한 띠올에 모곡서원을 창건하고 암천 박증 선생을 주벽으로 모 셨고, 이후 연산 충곡서원과 무안 병산서원에 각각 배향되었 다. 암천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대성(大成)은 장사랑 참 봉으로 불사(不仕)하였으나, 사후 통정대부 형조참의에 추증 되어 후손들은 참봉공 문중으로 세계를 이룬다. 그리고 차남 대붕(大鵬)은아버지암천공의유지를받들어산림에뜻을두 고 벼슬을 멀리한 채 끝까지 출사를 기피하였다. 사후에 가선 대부의빈도사(儀賓都事)로도사공문중의중흥조가된다. 참봉공(휘 대성)의 아들 윤(尹)은 음직으로 내섬시봉사(內 贍寺奉仕)로 1622년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1627년에는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부사 에 추증되고 아들 종헌(宗憲)과 종원(宗元), 종정(宗貞) 등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종헌(宗憲)의 호는 양한재(養閑齋) 로 동생 종원(宗元)과 함께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하였 고,부호군에 올랐고,그의 차남 휘 의(誼)는 덕행(德行)과 아 망(雅望븡청아한 명망)이 있어 공의 학식과 덕행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참판 이민서가 낭관(郎官)으로 추천을 하자 굳이 사양하면서, “나는 벼슬에 뜻이 없고 오직 학문이 부족함을 근심한다.”고말했다.또 정승이성구가명성을듣고찾아와서 “조정에서바야흐로 현량(賢良)한 사람을채용하고자 하는데 벼슬에 뽑힐 사람은 자네가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하고 출사 를 권유했다. 그 말을 듣고 놀라서 하는 말이, “사내대장부가 좋은 세상을 만나서 입신양명하여 요순시대를 만드는 것은 하기 싫은 바가 아니나 임금을 돕고 백성을 다스리는 술책은 오히려 출세를 이용해서 명예를 도적질하는 기롱을 받게 하 는 것이요,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실로 그르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이에이성구가슬며시안색을바꾸며강 력하게 권하지는 않았다. 공은 온 고을의 선비와 더불어 보인 당에서 모임을 갖고 강론과 공부를 했다. 특히 용서 윤원거와 동토 윤순거 등과 도의로 사귀면서 어렵고 의심난 것을 변론 하고 문답하니 진취적인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인목대비가 서궁으로 쫓겨난 뒤에 세상에는 관심이 없어 과거에 나가는 것을포기한채평생을제갈량의심기(心期)정신을흠모하여 자신을 공명의 포부(抱負)에 비했다. 그리하여 늘 조선 지도 를 걸어놓고 제갈량이 형주(荊州)를 보는 것과 같이 하고, 또 팔진도(八陣圖) 배치법을 그려놓고 제갈량의 묘법(妙法)을 연구했다. 이는 제갈공명이 북벌하려는 뜻이 조선 백성들이 오늘의책임을만난것과같은짓으로생각했기때문이었다.1 623년 인조반정 이후 만년에 선공감역으로 선발되어 물망에 오른 뒤 병조에 들어갔으니 품계는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이 다. 봉사공(휘 尹)의 차남 종원(宗元)은 암천공의 증손으로 字 는중후(仲厚),호는학당(鶴堂)으로보인당유생으로학문을 연마하였으며, 사계 김장생 선생과 신독재 김집 선생의 문인 이기도 하다. 청년시절 여러 번 과거에 실패했으나 낙담하지 않고 이르기를 “장부가 세상에 나서 입신출세하여 부모를 현 달(顯達)케하지못한다면마땅히백만장자가되어힘차게사 는 것도 좋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마침내 힘써 일하여 수십 년 내에 부(富)가 한 고을을 움직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 제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송시열은 묘갈명 을 쓰면서 “가히 유(柳, 유종원 중국 당나라 문인)의 문장의 부(文章之富 )에 비길 만 하다.”고 하였다. 1624년(인조2) 이 괄의 난에 인조가 공주로 몽진을 갔을 때 군량이 떨어지자, “임금이파천함에있어신하된자가몸도가히잃을것인데재 물을 어찌 아끼랴.”하고 즉시 쌓은 곡식 2천석을 나라에 바치 고 또한 창을 메고 임금을 호위하였다. 이에 김상용이 임금께 아뢰어 사변이 끝난 후에 자헌대부의 직첩을 내렸다. 또 병자 호란에는 곡식 800석을 내어 호남 장사 3천여 명을 구제하니 분조(分朝)에서 지중추부사에 배명하였다. 사계 김장생이 호 소사(號召使)로 있을 때 장계를 올려 “박종원은 비단 군량을 바쳤을뿐만아니라사람됨이가히쓸만하다.”고천거하였고, 정승 심열이 또 말씀을 아뢰니 임금이 충성을 사강하게 여겨 통천군수를 제수하였다. 이후 서추(西樞, 왕명의 출납, 병기, 군정, 숙위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에 승진하여 모든 경대 부와 같이 조정에서 봉직하다가 어버이 봉양을 위해 사직했 다.조정에서는 상을 다 주지 못했다 하여 신음과 김반의 장계 에 따라 아들 훈(訓)에게 전의현감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아 버지,조부,증조부등3代추증케했다. 현감공(휘 훈)의 장자 휘 상문(尙文)의 자는 욱재(郁哉)호 는죽촌(竹村)으로천성이독실하여지극한예로써부모를섬 기고 새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양친에게 드려서 맛을 본 후에 야 자신도 맛을 보았다.그 아버지가 성품이 엄해서 혹 기색이 좋지 못한 때에는 심히 편치 못하여 종일토록 식음을 전폐하 고 극진히 공경하여 반드시 문밖에 서서 돌아올 때를 기다렸 다가 식사를 하였다. 아버지 병환이 있고, 또 모친이 환후가 있어 다 위독하자 목욕재계하고 밤새워 기도하니 두 분이 모 두쾌차되었다.자기손에피를내어그부친의수명을하루연 장시켰으며, 부친이 수박을 원하자 제철이 아님에도 원근에 서 구하여 다행히 얻었으나 때가 늦어 드리지 못했다.그 뒤로 는종신토록수박을입에대지않았다. 어머니가난치병을얻어여러해를고질로신음하였는데항 상 창 밖에 엎드려서 물러가 않고 머리를 조아려 하늘에 빌었 다.한모금의물과한술의밥도어머니가잡수신후라야식사 를 했다.그 모친이 비록 병환이 있으나 아들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입속의말로,“내가식사를했으니너도밥먹으라.”고하 였다. 어머니가 별세함에 이르러 피눈물로 슬픔을 다하여 부 친상 때와 같이 하고 제사에 드리는 물건을 반드시 손수 장만 하고 물건이 좋은 게 있으면 그 값을 따지지 않으므로 장사치 들이다투어그집에모여들었다. 지금은 다리가 없어졌지만 公으로 인해 무겁교(無 橋 ) · 조석교(朝夕橋)의 일화가 전해진다. 무겁교는 논산시 상월면 에 있었던 다리인데 효자공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동네 앞 냇가에 아침저녁으로 고기를 잡았는데, 고기가 어느 때고 끊 이지않음으로그다리를사람들이조석교(朝夕橋)라하고혹 은 부모를 공양함에 있어 두려워하는 게 없다하여 ‘무겁교’라 고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다리가 없어졌지만 ‘무겁다리’라 는 이름이 전하고 있다. 이러한 효행으로 1682년 겨울에 시골 사람들이 모여 노성현감에게 글을 올리고 현감이 감사에게 주청하자, 그 사적이 묻일까 염려되어 나라에 장계하여 올린 글과 같이 시행해 줄 것을 간청하니 1683년 정월 18일에 예조 에서 정려(旌閭)의 명을 내렸다.공이 세상을 뜨자 그 아들 수 형과 수강이 손의 피를 내어 드리고,수강의 부인 이씨가 임종 할 때에 그의 아들 시혁의 나이 겨우 13세에 단지하여 약을 달 이니아들,손자가모두효성이지극했다. 이에 1683년 우암 송시열이 그 효행을 기려 ‘죽촌공 박상문 효행전(竹村公孝行傳)’을 썼다. 그에 앞서 조정에서 내린 정 려는 학당리 북쪽 지경리에 건축되었다. 또한 학당리와 경계 를 이루는 곳에는 옛날에 공이 조석으로 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했다는 무겁교 혹은 조석교에 얽힌 일화가 전설로 남아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어 최근 빗돌에 그 사실을 새겨 세인들 에게효(孝)사상을고취시키고있다. 군수공 휘 종원의 차남 휘 겸(謙)의 자(字)는 자익(子益), 호는신재(新齋)이다.타고난성품이온수하고극히자상하여 부모를 섬기되 그 효도를 다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극진하 였다. 일찍이 과거를 보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 중에 홀연히 놀라고 근심되어 진정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그 연고를 묻자 “오래 병석에 계신 어버이 곁을 떠나 꿈이 심히 상서롭지 못하여 내 마음이 진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과 연 조금 있다가 흉보가 이르니 사람들이 효에 감동한 소치라 고하였다.매번선친의기일을당하면문득울면서“아버지가 별세 하셨어도 자식으로서 얼굴을 떠나보내지 못하였으니 나 는 참으로 천지간 죄인이다.”고 말하고, 전후 장례와 제사를 한 결 같이 예에 따르고 종신토록 부모가 계실 때와 같이 하였 다.평생 사람의 시비를 말하지 않았으나 악이 과한 자가 있으 면 반드시 정색을 하고 경계하였다. 사우들과 선배들이 그의 사람됨을 잘 알므로 늘 세상에 쓰이지 못함을 아깝게 여겼다. 부제학 김경여가 일찍이 조정에 천거할 뜻이 있었으나 차마 어버이 곁을 떠나 멀리가기를 사양했다. 음직으로 통덕랑(通 德郞)에 가자 받았으며,향년 69세의 일기로 별세하니 정헌대 부 의 정 부 좌 참 찬 송 규 렴 이 묘 갈 명 을 짓 고 현 감 이 집 옥 이 썼 다.아들일곱을두어크게번성하였다. 신재공(휘 겸)의 차남 상의(尙義)는 통덕랑으로 그의 넷째 아들 휘 수담(壽聃)의 증손 휘 함( 鞫)은 사마시에 오르고, 타 고난 효자로 그 명성이 떨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그의 아들 진하(鎭廈)의 字는 만초(萬初),호는 계헌(鷄軒)으로 18 74년 늦은 나이로 금영(錦營, 충청감영을 이르던 말) 시험에 응했으나 낙방했고, 1884년에 다시 금영에 응시하였으나 실 패했다.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여 특별한 은전으로 가선(嘉 善)에 올랐다가 돈녕부도정에 제수되었다. 일찍이 과거에 뜻 을 두어 백발이 성성하도록 여러 차례 낙방을 거듭했음에도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71세에 벼슬길을 얻었으니 끝내 뜻을 이루었다. 지극한 효성으로 선조 및 외선조 봉양함에 성력을 다한 사실은 당시 노성 고을의 사람들이 무두 알고 있는 파다 한소문이었다. 뱚파조별약사 무안박씨노성파(魯城派) 바우내전경및유적지. 무안(면성)을 관향으로 하는 박씨는 시조 왕의28 대손 경명왕의6자 휘 언화(諱 彦華, 완산대군) 의 8대손 휘 진승(諱 進昇)께서 고려조 국학전주(國 學典酒)로 기자팔조지교(箕子八條之敎)로써 민심 을 순화 한 공으로 무안군에 봉 하고 무안을 식읍 (食邑)으로받아 관향지로 삼았으며공(公)을중조 (中祖)일세로 하여일천여년을 이어 오면서 경향 각지에 이십 육파 삼만여 세대에 70,000여명이 분 포되어세거하는씨족이다. 무안박씨 관향조의7세 문오(文晤) 공이 정승으로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에 봉해져 그 자손이 한 동안 면성박씨(綿城朴氏)라 고도 하였고, 이에 아 직도호적상에는면성박씨라고도기록되어있다. 공의아우 문정(文正)은 국자감 중시에 61인 중 장 원급제로 호부상서에 올라 고려 팔만대장경 창제 공신으로KBS 역사스페셜19회차팔만대장경편 에소개된바있다. 논 산 의 노 성 파 는 조 선 초 기 암 천 박 증 (朴 增, 1461 ~1517) 선생이 노성현 암천(현 논산시 상월면 학 당리(바우내)으로은거한이래노성일대에세거하 며기반을마련하였다.노성에서“동박·서윤·남남 ·북홍(東朴·西尹·南南·北洪)”이라 하여 주요 성 씨를지목하는표현이전해지고있는데,이에의하 면 무안박씨는노성현을대표하는 성씨중의하나 로 성정하였고,특히노성면의무안박씨는매죽헌 성삼문의 외손으로 그의 충의정신을 계승하고 있 어 지역의토반으로 성장 향촌사회를 이끌었음을 알 수 있 다 . 뱚노성파의선원세계 1627년가선대부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로 추 증한 교지 뱚노성파(魯城派)약사 뱚 ▶7면으로계속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