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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한국불교학 53집 으나, 양혼허의 은해사 강사 임명 날짜가 1913년 3월 15일이다. 그러므 로 김법린의 출가는 1912년이 아닌 1913년으로 사료된다. 2. 범어사와 권덕규, 서상일 김법린은 은해사에서 열여섯 살 때까지 곧 1914년까지 수학하다가 동 래 범어사 明正學校로 떠났다. 이는 은사 양혼허가 1914년 5월 2일 해 인사에서 선사법계를 품수하고, 11월 대구부 경북포교당 포교사에 임명 된 상황과 연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0) 양혼허는 이듬해인 1915년 11 월 3일 범어사 명정학교 교원에 임명되어 김법린과 다시 상봉하였다. 명정학교는 1906년 범어사 내에 설립된 불교계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1908년 校舍가 금어암에서 枕溪寮(현 범어사 보살선방-논자 주)로 이전 되었다. 김법린이 명정학교 재학 시절 영향 받은 인물은 국어학자 권덕 규(1891-1950)와 독립투사 서상일(1885-1962)이었다. …그러다가 1년 후에는 범어사(梵魚寺)로 가서 명정학교(明正學校) 복 습과(중학과정)를 다니고, 다시 불교 과정(四敎科)을 이태 동안에 걸쳐 공부하던 중, 권덕규(權悳奎)와 서상일(徐相日)선생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내 학업성적이 좋다 하여, 서울 중앙 전수학교(佛敎中央專修學校- 지금 東國大學校 前身)로 편입하게 되었으니, 어릴 적에 꿈꾸던 서울 유 학의 목적은 이루어진 셈이다. 21) 권덕규는 경기 출신으로, 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1914년 7월 22일부터 8월 22일까지 명정학교에서 朝鮮語夏期講習所를 열어 강의하였다. 조선 19) 「銀海寺住持就職認可ノ件: (楊渾虛)履歷書」. 20) 「金振麟 除籍謄本」에 의하면, 선친(김정택)의 타계 일자가 1914년 5월 11일이다. 이 점도 고향을 떠난 계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21) 김법린(1963) pp.62-63.; 복습과는 보습과의 오기로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