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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기미년 삼월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에 적수공권으로 봉기한 천안군 입장 사람들의 독립만세 함성과 성스러운 애국혈의 뜻을 새기니 그 애국정신이 만대에 계승되고 온 나라에 퍼져 나가리라. 이 고장은 산천이 아름답고 인걸이 끊임없이 나와서 백제 온조의 도읍이래 유서 깊은 충의열사의 고장으로 되어 왔다. 일제가 우리조국을 침략했을 때에도 한말에는 이 고장에서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이 부단히 전개되더니, 기미년에는 다시 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기미년 삼월 일일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의 물결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갈 때, 이 고장 입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폭발하였으니, 곧 삼월 이십일의 양대 사립 광명학교의 나이 어린 여학생들 및 양대 장꾼들의 봉기와 삼월 이십팔일 직산 금광 광부들의 봉기가 그것이다. 광명학교에서는 이미 삼월 이십일부터 십사세의 민옥금(원명:민영숙), 한이순, 황금순 등 세명의 어린 여학생이 주동하여 몰래 태극기를 만들고 이십일의 입장 장날에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다른 학생들과 결의하였다.
삼월 이십일 오전 열시 하얀 상복으로 갈아입은 세 여학생을 선두로 팔십 여명의 학생들은 교문을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양대시장으로 향하였다. 여기에는 광명학교 강기형 선생과 광부 안시봉 등 주민들도 다수 참가하여 일백 여명의 대열이 학교로부터 양대 장터까지 행진하는 중에 독립만세의 함성이 십여리 길에 가득 메아리쳤다. 양대 장터에서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애국심에 불타는 광부 김병열, 김채준과 상인 조쌍동(원명:조규영)등도 시위대열에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선도하니 장터에 나와있던 칠백여명의 천안군 농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시작했고 삽시간에 시위군중은 일천 여명으로 늘어나 온 장터는 감격어린 대한 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일제 천안 헌병대가 급파한 일백오십여명의 일본 군경이 시위군중을 닥치는 대로 내리치고 잡아 가니 체포당한 애국 군민이 무려 이백여명이었다. 삼일운동 때 여학생의 애국투쟁으로서 이웃 병천의 유관순열사가 전국에서 대표됨은 천안의 자랑이거니와 그보다 십여 일 앞서 양대 광명학교 여학생들의 주도로 양대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음은 또한 버금갈 수 없는 천안의 자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