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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 • 여성 3·1운동 59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세계대전의 사후처리를 위해 열리고 있던 파리강화회의는 한국인들에게 독 립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었다. 2월 1일 설날 전후로 천도교계에서는 만세운동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조소앙 등 해외의 독립 운동가들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2월 8일 에는 도쿄(東京)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이 ‘조선청년 독립단’ 명의로 「선언서」를 낭독했다. ‘2·8 독립선 언’이었다. ‘2.8 독립선언서’는 일본 주재 각국 공사 와 국회, 조선총독부 등에 발송되었다. 낭독 직후 60 여 명이 체포되는 가운데 김마리아가 「2·8 독립선언 서」를 숨겨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 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다. 민족대표 33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2월 27일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이종일의 책임 아래 독립선언 서 약 2만 1,000매가 인쇄되었다. 2월 28일부터 독 립선언서가 천도교 지역교구와 기독교계 학교를 통 해 전국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전국으로 배포되는 가 운데 서울, 평양, 선천, 안주, 원산 등 10여 개의 도시에 서 만세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직후 조선총독부는 만세운동을 ‘시가지의 단순한 시위’로 치부해 버렸 다. 그러나 3월 3일 개성, 3월 4일 수원, 3월 6일 인 천 등 경기도를 비롯해 전국 주요 도시에서 만세운 동이 계획, 전개되었다. 이렇듯 만세운동은 전국으 로 확산되었다. 그 한복판에 이선경, 조화벽, 김향화 가 있었다. 이선경, 비밀 구국운동에 투신하다 1902년 5월 경기도 수원면 산루리(현재 수원시 팔달구 중동)에 살고 있는 이학구(李學九)는 둘째 딸 을 얻었다. 부모는 딸을 이애기(李愛基)라 불렀다. 이 선경(李善卿)이라는 이름은 1916년에 개명한 것이 다. 이후 수원공립보통학교(현재 수원 신풍초등학 교)를 졸업했다. 1918년 4월 상경해서 사립 숙명여 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숙명여학교 2학년 재학 당시 3·1운동이 기미독립선언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덕수궁 대한문 앞의 3·1운동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