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page

이달의 순국선열 • 홍진 선생 59 관·신숙·지청천 등으로 하여금 중국의 길림자 위군(吉林自衛軍)·중동철도 호로군(護路軍)과 한·중 연합을 도모토록 하고, 이들과 연합하 여 서란현 쌍성보 등에서 항일전을 펼쳤다. 한국독립당 새로 세우고 한국광복군 편성 1933년 중국 관내로 이동했으나,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난징(南京)을 공격해오자 임 시정부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1939년 10 월 16일 치장(綦江)의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5월 우익진영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중 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9월 17일 한국광 복군을 창설하는 총사령부성립전례식에서 정부대표로 훈사를 하였다. 10월 8일 김구 주석 체제가 성립되면서 송병조와 함께 임시 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42년 10월 26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장에 선출되어 세번째로 의장을 맡았다. 이후 광복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2월 8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유동열·김붕준과 함께 주석단에 선 출되었다. 1945년 8월 17일 충칭(重慶)에서 일제의 항복에 따른 향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제39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여, ‘화평공제(和平共濟)의 새 정신’으로 당면문 제를 잘 해결해 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이 해 11월 5일 주석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29명과 함께 충칭을 출발하여 상하이에 도착 하였다. 12월 1일 제2진으로 조성환·황학수· 조소앙 등 22명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하여 12월 2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946년 2월 1일 명동천주교회당에서 임 시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 고,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의장으로 과 도정권 수립을 추진하던 중 심장천식으로 입 원하여, 1946년 9월 9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진이 쓴 글씨 ‘여자동귀 (與子同歸, 자손들과 함께  돌아가리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있는 홍진 묘와 묘비지(이상 독립기념 관 제공) 홍진 별세 기사(『동아일보』 1946년 9월 10일자,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