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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 • 3·1운동 59 는 해이다. 19세기 후반 국제사회는 산업자본주의를 바탕으 로 한 제국주의 시대였다. 한국은 내정 개혁과 외국 문물의 수용을 통한 국가 발전을 추진하는 동시에 자주 주권국가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 하는 난제를 극복해야 했다. 제국주의 일본은 1876년 무력적 강 제 개항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전승국으로 서 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결탁해 우리나라를 침탈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국가 권력이 무력 화(無力化)되어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 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총독을 정점으로 헌병무단통 치를 통하여 식민지 직접 지배체제를 구축해 한반 도를 유린하고 한국민들을 탄압하며 한국을 일본화 하려는 정책을 강행했다. 한국인들은 엄혹한 식민지 하에서도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민족독립운동을 전 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국제 정세가 변 화하면서 독립운동의 전환기가 마련되었다. 국권을 침탈당한 3,107일, 8년 6개월만인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명의의 독립선언서가 선포되어 한국 민들은 자주 독립을 주창하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 (高唱)하는 3·1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암흑의 동굴 속에서도 독립의 빛이 보이다 3·1독립운동은 1919년 1월 하순부터 준비되었다. 손병희 집에서 천도교 지도자들이 회합했다. 이어 2 월 상순 천도교와 기독교 계열 지도자들이 상의하여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 · 의견서 · 청원서를 작성해 독립을 선언하고자 했다. 2월 11일 이승훈은 기독교 측 동지 규합을 위하여 평북 선천으로 귀가했다. 그는 양전백 집과 평양 기 홀병원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2월 17일 서울로 상 경했다. 2월 21일 천도교와 기독교 대표 간의 협의 가 이루어졌고, 2월 24일 양교(兩敎)의 합동이 성립 됐다. 2월 10일 독립선언서 기초가 만들어졌고, 2월 25 일에 의견서, 청원서 등 문건의 초안이 작성되었다. 천도교 측은 2월 25~27일 기도회로 상경한 교직자 중 양한묵 · 이종일 · 박준승 등 15명을 대표로 선정했 다. 기독교 측은 2월 27일 이승훈 · 양전백 · 유여대 등 1910년대 남산 기슭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 근경과 원경(차경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