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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동휘 선생 59 립이 가까운 시기에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결과 국내외에서 여러 임시정부 가 조직, 발표되었다. 이들 임시정부에서 이 동휘는 손병희·이승만과 함께 정부수반으로 선임되거나 국무총리총재 또는 군사책임자로 선임되었으나, 어느 직책도 수락하지 않았다. 그는 주위 측근들에게 “한인사회당의 당수면 되었지 무슨 정부의 직책이 중요한가”하며 반 문할 정도로 이들 임시정부의 각원(閣員) 취임 수락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3 · 1운동의 ‘민족 대표들’과 임시정부 조직자들을 비판했는데, 미국 등 서구열강이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에는 열강들이 패전국의 식민지를 분할하는 것으 로 끝날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것이었다. 이 러한 전망이 가능했던 것은 그를 비롯한 한 인사회당 간부들이 시베리아내전 시기에 미 국 등 열강이 일본과 연합하여 반혁명적인 백위파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던 사실을 몸소 경험함으로써 이들 열강의 제국주의적 본질 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 특별상설 의회에서 대한국민의회측은 중국 상해(上海) 임시정부 특사 현순과 김성겸의 제안을 토의 하였다. 이 회의에서 국민의회는 상해 임정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해의 대한민국임시 정부와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가 국 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漢城政府) 봉대(奉 戴)에 합의하게 되었고, 국민의회는 해산을 선언하였다. 국민의회의가 해산을 결의하는 과정에서 그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동휘는 한성정부의 국무총리총재에 선 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출범할 임시정 부의 국무총리직을 맡고자 상해로 갔다. 그 러나 상해 임정과 국민의회 사이에 합의사항 의 해석을 둘러싸고 발생한 ‘승인개조분쟁’ 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상해측과 정전(政 戰)을 벌임으로써 대국을 파괴할 수 없다”며 1919년 11월 3일 개조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동휘를 비롯한 주요 내 각 각원들이 취임함으로써 지지기반이 훨씬 확대되었으며,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서의 권위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있던 임 시대통령 이승만은 사실상의 분립정부인 구 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워싱턴에 설립하고 종래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에서 수합하던 이동휘가 참여하여 1919년 2월 말~3월 초에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독립 기념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