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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황병길 선생 59 였다. 또한 3월에는 박치환(朴致煥)과 함께 ‘건 국회’를 조직하고, 25만루불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러시아령으로부터 3백정의 무 기를 구입하여 무장하고 국내에 진입한다 는 계획을 세웠다. 1919년 7월에는 블라디 보스톡의 신한촌에서 이동휘(李東輝)·문창 범(文昌範)·김립(金立)·오영선(吳永善) 등 2 백여 명의 독립운동 대표들과 함께 신한민 회(新韓民會)를 조직하고 국내진공을 논의 하였다. 9월에는 이명순(李明淳) 등과 함께 북간도 대표자 회의를 훈춘현 사도구에서 개최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무력항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애국부인회 조직, 군자금 모집과 부상독 립군 치료 등 총체적 독립운동 펼쳐 1919년 9월에는 훈춘 연통랍자(煙筒笠 子)에서 훈춘 거주 한인 여성들로 하여금 ‘훈춘애국부인회’를 조직케 하여 부녀자들 의 독립운동과 민족운동 후원, 생활개선 등 을 도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밖 에도 여러 조직들을 활용하여 거액의 군자 금 모금과 전상병자(戰傷病者)의 치료, 구제 사업 등을 전개하는 등 총체적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군정사(軍政司)후원회 숭례향(崇禮鄕) 책 임자로 활동하다가, 1920년 전반기에 서 일 · 김좌진이 영도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 政署, 정식 명칭은 대한군정서)와 통합하여 황병길의 동정을 파악하여 보고하는 일제 당국의 「불령선 인(不逞鮮人)의 동정에 관한 건」(국가보훈부 제공) 이동휘(오른쪽)와 함께한 황병길(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