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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가평의 얼과 인맥 신숙은 상해에서 자신을 비롯한 천도교인들의 입 지가 약화되자 1920년 9월 상해를 떠나 북경에 도 착하였다. 그리고 박용만(朴容萬), 신채호(中솟浩) 등과 협의하여 군사통일촉성회(單事統-않成會)를 발기하였다 29) 신숙은 중국 동북지역의 군사대표와 회합을 추진하기 위하여 배달무(裵達武)를 남만(南 滿)으로, 남공선(南公善)을 북만(北滿)으로 파견하 였다 3이 그리고, 신숙은 1921년 3월 경 천도교인들의 결속을 위하여 통일당을 재정비하였다. 이 통 일당은 1919년 4월 6일 국내에서 삼일운동의 주지를 관칠하기 위하여 다수 유지의 발기로 만 들어졌는데 북경에서 군사통일회의가 개최되기에 앞서 신숙 등이 재정비하였던 것으로 보인 다 당시 신숙은 통일딩의 총리로 선임되었고, 최동오, 김의종, 이 영근은 각각 정치부, 경제부 문화부의 책임을 맡았다.31) 1921년 4월 17일 북경 에서 열린 군사통일회의 에 신숙은 신달모(디]達模) . 황학수(黃學秀) 와 함께 통일딩-의 대표로서 참석하였다.4월 18일 임원선거 에서 신숙은 의장으로 선출되었 고 재정 위원에 선임되었다. 당시 신숙은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을 비판하고 임시정부가 개혁 과 군사통일노선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군사통일회의는 독립운동가들의 참여가 미미하여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신숙은 운동방향을 전환하여 1922년 4월 10일 원세훈과 함께 [국민대표회주비위 원회선언(國民代表會뚫備委員會宣言) ]을 발포하여 독립운동전선의 통일을 촉구하였다.32) 그리고 신숙은 1922년 7월 말 임시의 정원, 국민대표회주비회, 한형권 금전사건 등 시사를 토의하기 위해 상해에서 열린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참가하여 국민대표회 의 개최를 촉 구하였다.33) 신숙은 1923년 2월 2일에 개최된 국민대표회의 석상에서 의정기초위원(議政끊 草委員)으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기까지의 경과보고를 하였다.잉) 또 2월 5일과 6일에 있은 각 분과별로 책임자 선정 시 헌법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35) 국민대표회는 임시정부를 개조할 것인가 창조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크게 두 파로 나 뉘어졌는데 신숙은 천도교인인 이민창, 장붕익, 강수희(姜受禮) 등과 창조파로서 활동하였 다.36) 즉, 그는 만주 혹은 노령 에 임시 정부를 새롭게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러 나 국민대표회의는 창조파와 개조파 그리고 중립파 간의 의견이 통일되지 못하였 29) [일기 J. r島山 安昌浩 全集J 4, 905, 910-914, 927, 930쪽 3이 신숙 r나의 -生J , 61 면 31) 신숙 r나의 -生J , 61 먼 32) r大同」 저13호, 1921. 7. 9. r조선민족운동년감J ,2-3면 신숙 r나의 -生J , 56면 국회도서관 r한국민족운동사 료j 중국편, 278면 33) r조선민족운동년감J , 165면 34) r조선민족운동년감J , 165면 . 35) r한국민족운동사료J , 중국편 , 303-305면 . 36) r한국민족운동사료J , 중국편 , 303-305면, {한국독립운동사} 임정편 1 1 자료2. 627-62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