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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동안에 가세가 파탄 가족은 분산되여 부친은 만주로 떠나고 공은 모친과 같이 전북 익산에서 근근한 생활 속에서 삼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부인의 내조를 얻어 사고무친이 된 유관순 양의 남제 관석을 교육시켰으니 가상하도다. 독립 순열의 가족을 위하여 어려운 환경에서 이 거룩한 처사야 말로 감탄불기하도다. 기후에는 교직을 사퇴하고 언론창달로서 민족의식 고취에 유의하여 조선일보 이리지국 동아일보 강경지국을 경영하였고 이어서 본사에 입사후에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왜경의 간섭으로 부득기 사퇴 하향하여 동지를 규합 금강문인회를 조직하고 규암면 합송리에 농민학원을 설립 빈곤 자제 교육에 힘쓰는 일방 민족사상을 주입시켰고 당시 거국적으로 펼치던 항일단체인 신간회 부여지부를 조직 계몽을 전개하여 어느 집회에서도 참여하여 산하를 진명하듯 기 강연이야말로 청중으로 하여금 희비 감명을 자유로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32세 시 7월에 왜경에게 검거되어 고문과 기아에 추호도 불굴하고 공주형무소에서 징역 4년의 형을 치루었으니 내 이것이 유기섭 이호철을 비롯한 세칭 부여 53인사건이다. 출옥 후 형독으로 와병 중 배재고보 동창인 이용설 박사의 주선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기 정성어린 약석의 효과도 없이 1938년 4월 21일 조국광복 약 7년을 남겨놓고 조국독립의 원한을 품은 채 39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여 천추의 원혼이 되였으니 오호애재라. 영구는 서울에서부터 왜경의 감시로 삼일 삼야를 걸려 상천도 통곡하듯이 보슬비 나리는 밤 9시 고향에 운구되였으나 왜경이 조객을 막아가며 일명전 매장하라는 가혹한 催促(최촉)으로 익일 새벽 향리 공동묘지에 치장하였다가 후일 향리 종산에 이장하다. 후사는 남 재필 여 이상덕 강동화 손 석호이다. 기후 1967년 공의 투철한 애국애족의 장지 의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부여 애국동지회 대표 강용구 이호철 서울 광복동지회 대표 김중화 등 인사들이 발기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입비사업을 추진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이 분들이 작고 후 침체 중 지역사회 교동지들이 재발기기 뜻을 이어 추진하여 이 비를 세워 후세에 전하노라. 서기 1975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