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page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가톨릭 신자였던 부모님에 의해 어려서 세례를 받고, 이후 성직자로서 의 길을 가던 중 ’65년 처음 창설된 강원도 원주의 초대 교구장으로서 취임하게 된다. 동지는 당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교회안에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고 신 용협동조합 설립, 진광학교선립, 가톨릭 기숙사 운영과 교육원 운영을 통한 협동 적 삶과 직업훈련 교육을 하였다. 황지에 노동회관을 만들고 가톨릭노동청년회 와 가톨릭 농민회를 조직하여 노동자와 농민들이 권리를 스스로 찾을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러한 협동사업을 조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의식개발을 하며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한 소리에 귀기울이는 활동을 하였다. 김지하의 구속과 전태일 동지의 분신은 동지로 하여금 사목활동 뿐만아니라 사회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71년 설립에 참여했던 원주문화방송의 부정이 드러난 후 민중들의 어려운 삶 이 정권의 가공할 부정부패와 부조리에 있음을 지적하며 10월 5일 원주를 중심 으로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개최한다. 이러한 운동은 전국 천주교와 종교단체 시 민단체에까지 번져 나가게 된다. 이후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역 이사장으로 추대되어 종교활동뿐만 아니라 사 회적 영역으로 활동을 하며 인권신장을 위한 활동들을 하게 된다. 종교 및 사회 지도자적 위치에 있던 동지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 박정희정권에게는 눈에 가시 였다. ’74년 7월 6일, 중앙정부 요원에 강제 연행되어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하여 조사 를 받고 구속된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에서는 정의평화와 지주교를 위한 미사와 기도회가 열린다. 건강때문에 7월 11일 연금상태로 풀려난 이후에도‘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양심선언 성명서를 발표하며 박정희 정권을 반대 하는 입장을 밝혔다. 동지의 구속이후 사제들을 중심으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 사제단이 만들어져 이후 시국선언 등 독재정권에 맞선 활동들을 하며 인혁당사 건, 동아일보 언론탄압, 70년대 현장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위한 지원활동을 하게 된다. 석방이후 동지는 고난을 겪고 있는 사회적 약자와 사회정의를 위한 지원활동 을 하였는데 ’76년 3월 통일을 위한 민주구국선언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지원활 동, 김지하 구출위원회 결성과 석방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하였다. ’79년 10월 박정희 암살 이후 동지는 군사정권에 대한 투쟁방식을 변화시켜 민 중의 삶의 질을 돌보는 사목활동을 하다가 ’93년 72세를 일기로 강남성모병원에 서 운명하였다. 끝내살리라 |117| 지학순(당시72세) 제천 배론성지 천주교 성지자 묘역에 안장 1921년 9월 9일 평남 중화군에서 태어남 1950년 2월 서울 성신대학(현 가톨릭대 신학대) 편입 1952년 12월 15일 사제 서품 1965년 3월 22일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1969년 10월 5일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 주교 1971년 10월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이사장 1972년 4월 10일 국제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명예회장 1973년 6월 한국노동교육협의회 회장이 됨. 70년대 노동운동 지원 1974년 7월 6일 중앙정보부에 강제 연행 1974년 7월 23일 양심선언 발표 1974년 8월 12일 긴급조치 1, 4호 위반, 민청학련사건 관련 협의로 구속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 선고 1975년 2월 17일 226일만에 구속집행정지로 출감 1985년 9월 20~23일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일원으로 평양 방문, 동생 만남 1993년 3월 12일 강남성모병원에서 운명 |11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김영삼정권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