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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정착시켰으니 一次로 六千四百六十六丁戶를 二次로 六萬九千戶를 대이동(大移動)케 한 것이다 가장 북쪽에 있는 공험진의 영역은 북으로 수분하(綏芬河) 일대에 이르고 南으로 두만강 內外까지며 東으로 연해주(沿海州)에 이르고 西로 목단강(牧丹江) 유역에 걸치어 골간兀적합(骨看兀狄哈)까지 확장하니 公에게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를 제수(除授)하고 재차 출정후(出征後)에는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을 심봉(尋封)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千年史를 恨되게 한 일이 벌어졌다 예종(睿宗)四年에 함주(咸州) 영주(英州) 복주(福州) 웅주(雄州) 길주(吉州) 통태진(通泰鎭) 숭령진(崇寧鎭) 진양진(眞陽鎭) 선화진(宣化鎭) 등 아홉 진성(鎭城)을 자자손손(子子孫孫) 조공(朝貢)을 바치며 고려(高麗)를 부모(父母)의 나라로 받들겠다는 여진(女眞)의 거짓 조건에 넘어가 되돌려 주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진의 농경민(農耕民)에게 돌려준 아홉 진성지역은 다시 종래의 기미주(羈縻州) 상태로 되돌아가서 고려에 복속(服屬)한다는 조건이 전제된 것이매 척지(拓地)의 후과(後光)은 단절되지 아니하였다 공험진(公嶮鎭)은 그대로 지켜져 내려오다가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나 한겨레는 끊임없이 목숨걸고 두만강을 건너가 간도(間島)지방을 옥토(沃土)로 일구어내는 정착지역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조(朝鮮朝) 숙종(肅宗)은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다시 세워 옛 공험진지역인 간도지방(間島地方)이 우리의 영토(領土)임을 증거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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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개척(國土開拓)의 목표지(目標地)가 되게 한 것이다 문숙공(文肅公)은 시조(始祖)인 좌고려태조통합삼한공신삼중대광태사(左高麗太祖統合三韓功臣三重大匡太師) 諱 신달(莘達)의 현손(玄孫)으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위인(偉人)인지라 경서(經書)를 탐독하는 문사(文士)이며 탁월한 외교가(外交家)이며 홍익(弘益)의 현상(賢相)이기도 하다 일곱 살때의 七言詩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맹아(萌芽)를 보였고 요(遼)에 숙종즉위(肅宗卽位)의 表를 傳하였고 고려숙종(高麗肅宗)二年에 公이 전폐(錢幣)의 통용(通用)을 강력(强力)히 주청하여 주전도감(鑄錢都監)이 설치(設置)되었고 외교정사(外交正使)로 송(宋)에 가서는 정이천(程伊川)등과 더불어 詩를 창화(唱和)하였으니 응제시(應制詩)는 널리 회적(膾炙)되는 명시(名詩)가 되었고 숙종(肅宗)六年에 서기1101에 公은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에 나가 삼각산(三角山) 南쪽 지금의 청와대(靑瓦臺)터에 남경(南京)궁궐을 건설하였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公의 위업을 추모해서 김종서장군(金宗瑞將軍)은 경성(鏡城)에 노당(蘆堂)을 세워 公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였는바 훗날 정북사(靖北祠)로 개액(改額)된 것이고 경성(鏡城)의 원수대(元帥臺)에는 公의 개선비(凱旋碑)가 있고 단천(端川)에 장사대(壯士臺) 북청(北靑)에 시중대(侍中臺)가 모두 公의 유적지(遺蹟地)이고 북청(北靑)의 만뢰사(萬賴祠)와 평북가산(平北嘉山)의 조양사(朝陽祠)와 청원(淸原)의 호남사(湖南祠)는 公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祠堂)이고 파주(坡州)엔 公의 별서유지상서대(別墅遺址尙書臺)가 있고 예천(醴川)에 화남사(花南祠) 함평(咸平)에 수벽사(修闢祠) 광주(光州)에 단강사(端岡祠) 등은 모두 公의 위대(偉大)한 업적을 추모해서 사림(士林)들이 봉축(奉祝)하여 왔던 곳이다 이러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