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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의용병 현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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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은 사람의 상징이다. 그러나 때로 몸을 죽여서 의롭게 쾌한 길에 올라 최후를 마친 뒤에 그 이름이 천고에 빛나는 이 간간이 있으니 이 어찌 쉬운 일이라 하랴. 6.25사변에 온 천지가 붉은깃발과 괴뢰의 발길로 더렵혀졌을때 져야 할 의무도 없고 나라의 부름도 받지 아니한 20미만의 소년학도 49명은 대구땅에 모여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죽을 것을 맹세하고 수도사단 김석원 장군 휘하로 돌아가니 장하다. 이들이 학도의용병이었다. 이들은 용약 의성북방 삼거리 전투에 참가했다가 다시 포항으로 옮겼다. 이때 전세는 급하고 불리했다. 작전처에서는 학도병에게 포항여학교안 3사단 전면에서 적을 막으라는 큰 임무를 매꼈다. 8월 11일 새벽에 적은 쳐들어왔다. 본부의 연락은 끊어지고 적의 포탄은 지척에 뒤덮었다. 그러나 용감한 학도병들은 적을 세차례나 후퇴시키고 수십명을 사살한 뒤에 최후로 돌격전을 취하여 49명이 일시에 옥이 되어 부서지니 슬프다. 1950년 8월 11일 오후 1시 30분 경의 일이다. 군인도 아닌 소년학도들의 몸으로 구슬이 되어 부서진 그대들의 의기는 천추만대에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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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 이우근(동성중 3학년)은 1950년 6·25 한국전쟁 직후 포항지구 전투에 참전하던 중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다가 호주머니에 넣은 채 전투를 벌이던 중 그해 8월 11일 전사한 분입니다. 당시 이우근의 나이는 겨우 17세였습니다. 이후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고 이우근 학도병의 호주머니에서 미처 어머니께 부치지 못한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우근의 부치지 못한 편지는 영화 '포화 속으(2010)'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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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壽衣(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