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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2025년 9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태평양회의 앞두고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 청원서 발송 1921년 5월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 고, 8월에는 대(對)태평양외교후원회를 발족 하고 간사장을 맡았다. 이는 미국 워싱턴에 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에 한국독립 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조 직한 것이었다. 이승만과 서재필을 참석대표 로 선출하는 한편, 국내에서 각 사회단체와 지역 대표자 372명의 서명을 받아 「한국민이 태평양회의에 보내는 글을 보냈다. 그러나 태평양회의에서는 한국문제를 거론조차 하 지 않았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22년 4 월 의장직을 사퇴하였다. 1922년 8월 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되 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 표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할 때, 양측 인사들을 만나 타협을 도모하였다. 나아가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 개정 을 추진했지만, 임시의정원 의원의 자격 여 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면서 좌절되었다. 이에 1924년 4월 법무총장을 사임하고 전장 (鎭江)으로 가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1926년 7월 8일 국무령에 취임하여 임시 정부의 행정수반이 되었다. 국무령으로서 추 진해나갈 시정방침으로 3대 정강을 제시하 고, 내각을 구성하여 무정부 상태를 수습하 였다. 3대 정강의 핵심은 전민족이 단결한 정 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역적 안 배를 고려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한다는 방침 하에 최창식(내무)·이유필(재무)·김응섭(군 무)·조상섭(사법)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 로써 임시정부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발 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국독립당 창당. 일제 만주 침략에 한중 연합작전 대응 1929년 봄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우창현 (五常縣)에서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하고 사 장으로 활동하였다. 생육사는 지청천·황학 수·이장녕·김좌진 등과 더불어 북만주 일대 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되 었다. 이를 위해 농지를 매수하여 북만주 일 대에 이주해 있던 한인들이 생활기반을 안정 시키고,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1930년 7월 지린성 웨이허현(韋河縣)에 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에 선 출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김좌진 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지 청천·박관해·신숙(申肅) 등과 함께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하여 조직한 것이다. 이로써 북 만주지역 한인독립운동 진영의 대표적 지도 자 위치에 올랐다. 한국독립당은 1931년 11 월 당군(黨軍)으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 자 당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항일전을 전개하 기로 하고,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선임하여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다. 11월과 12월 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