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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결연히 학교를 중퇴 대붕회를 조직한 뒤 동지규합에 전념하다가 1919년 윤상태 남형우 안희제 박중화등 50여동지와 대동청년단에 가입 모험부장이 됨으로서 국내외를 연결하는 활동책임을 졌다. 대동청년단은 당시 국내에 기반을 가진 유일한 독립운동결사였다. 1919년 2월 하순 대동청년단 동지들로부터 전보를 받고 상경하여 만세의거에 참가한뒤 서부경남 일원의 중책을 띠고 귀가하였다. 그리하여 함안군 군북면 사촌 조용태집에 머물면서 군북의거 준비를 지휘하였다. 3월 하순 귀가하여동지 권영대 권태용 친제 상헌등과 종중선실 일신재에서 고향의 거사준비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3월 28일 선생이 주모한 고현의거는 앞바다마저 들끓게 하였고 4월 4일 선생이 지휘한 삼진의거는 국내 4대의거의 하나로 손꼽혔다. 선생은 그날 진양군 남문산에서 동지 서상일 김관제 신종목과 만나 앞으로의 제반 계획을 상의하고 곧이어 합천군 초계로 거유 이직현을 방문하여 국사를 담론하면서 그의 근친인 이원화에게 초계의거를 위림하였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위반죄 로 심의된 대구 28인사건의 한사람이었으나 피신하여 체포는 면하였다. 28인사건은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하였으며 이에 관련된 사람은 주로 대동청년단원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쳐 활약하는 열혈우국지사들이었다. 곽인협 김상집등과 아사동맹회를 조직한것도 그 무렵이었다. 1922년 1년간의 일본 피신행활에서 돌아와 전남 송절리의 호남물산사장인 종제 상구의 거실에서 의열단의 투사 이종암을 만나 3000원을 수교하여 상해로 가게하였다. 다음 해 3월 18일 이종암은 상해 황포탄에서 침략의 원흉 일제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전중의일)을 저격하였다. 22년 7월 선생은 일제헌병에게 체포되어 미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