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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적신 이근택의 자살미수 범인으로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끝에 8지에 못을 박은 정상과 다리에 주리를 틀어 반신불수가 된 색각으로 단기4249년에 10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왔으나 요감시인물로 지목받아 2명의 왜경 감시원이 항상 미행함으로 거향하면 친척까지 감사를 받을까 염려하여 강원 충청 등지를 전전유리하다가 익년에 도화면 당오리에 거주한 친족 기하요(호진)집에 찾아와 고용인으로 가장하여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후진을 교회하되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중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도화면 유지를 규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여의천의 황의석 집에 은신함에 일경보조원이 내습함으로 황씨의 모 정부인이 재빨리 큰 항아리 속에 의사를 감추어 체포를 면탈케 하였다. 그후 의사는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할 목적으로 기미년 여름에 제자 박길용 기항연을 데리고 광부 송정리역 구내에서 일숙하고 익일 기차를 타려고 막 개찰할 무렵 이를 수상하게 여긴 일경이 나타나 체포 당함으로 3인이 풍비박산하여 두 제자는 돌아오고 의사는 기어코 평안도 진남포까지 가서 도선코져 하였으나 경비가 삼엄함으로 할 수 없이 다시 돌아와 ○○용의 매와 결혼하여 1녀를 낳았다. 그 후 의사는 독립군의 군자를 모금하는 한편 그 방법으로 민영환의 충절을 혈죽묵화로 만들어 명문부호의 집은 물론 대마면 상남리 송주봉 댁에 가 상당한 거금을 받아 군자로 헌납하였다. 그러던 중 단기 4255년 7월 기하요의 서재에서 일헌병 矢羽田에게 체포되어 ○○인물을 자백하라고 가혹한 형벌을 가함으로 의사는 굳게 입을 다물고 단설하여 버렸으며 광주형무소에서 또 5년의 옥살이를 하고 나와 전신상○가 한 몸으로 처를 따라 장흥의 어느 피촌에서 망국의 원한을 품고 50세의 원백으로 서거하니 그 비통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며 그 명리를 버리고 살신성인을 한 정신은 어찌 우리 겨레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지 않으리오. 단기 4327년 월 일 의재 기산도 의사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 근기 임정 신병희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