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page


58page

불렀으며 일헌들과 극한 투쟁을 하셨다. 공은 한인관리 퇴직 권고문을 작성하여 이를 살포하고 수악왜인에 망종하는 그들의 맹성을 절규하셨다. 공은 1926년 10월 상해임시정부 국무령 이상용의 군자금 모집 지령서를 밀휴한 권인섭과 상종하여 이를 추진타가 왜경에 피체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 6개월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루셨다. 공은 그후 향리에서 저연학원을 창설하고 청년동지 인재양성에 심후를 기우리다. 공은 성품이 과묵강직하여 때로 한마디 하시는 말씀이 능히 사람의 비부를 찔렀다. 다음날도 공은 간담을 상조한 동지들과 무시상종하여 동분서주 조국광복에 안좌의 여일이 없었다. 이제 공은 가셨으나 공의 거룩한 넋은 겨레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계신다. 이에 오늘 우리 사회 후학들의 이름으로 이 비를 세움은 공의 인격과 지조를 길이 추모함이다. 이 비를 보는 이 마다 옷깃을 여미고 애국하는 뜻을 더욱 굳게 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