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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휘날리며 일본타도를 외치시면서 왜경주재소와 면사무소로 행진하시던 중 시위 군중 60여명과 같이 일본군 헌병들에 체포되신 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시면서 악독한 고문이 계속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아니하시고 옥내에서도 애국동지들과 같이 비인도적인 왜제타도를 부르짖었습니다. 공은 한편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않겠다고 거절하시면서 단식투쟁하시다가 1919년 5월 10일 옥내에서 순사하셨습니다. 이를 모르고 있던 유족들은 의외에도 동년 5월 16일 형무소 급식인으로부터 열사께서 옥중 순사하신 비보를 귀띔을 접하고 동감옥 뒷산에 가매장된 시신을 찾아 향리로 운구 봉안하는데 무려 3일간이나 소요되었는데 이를 보는 남녀노소의 조곡이 어어졌다. 공의 순절은 그 거룩한 구국애족의 정신과 투쟁은 천추의 빛이 나며 영원한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공의 유족사항은 옥사하신 후 노자친과 부인께서는 심통와명한지 1년 후인 경신년 12월 3일 부인 단성우씨가 하세하셨고 익년 신유년 3월 27일 노모친 남양홍씨도 별세하였으며 후손으로는 장남 용덕. 차남 용성 형자 중 장남은 6.25 수복 직후 부부 공히 사망, 차남은 국가공무원(정읍무서장)으로 정년 퇴직 후 1985년 정읍에서 사망. 그 후 양자로 입양한 석기도 1999년 사망하므로서 자손으로 지영 찬일 남매가 서울 등지에 거주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