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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백용성 선사 57 었다. 한편, 1924년부터 박한영 등과 함께 『불일 (佛日)』이라는 불교 잡지를 발행하고, 여러 도 시에 포교당과 선원을 개설하고 수시로 선회 를 열어 불교 대중화 운동을 통한 민족 계몽 운동에 박차를 가해 갔다. 특히 최초로 일요 불교학교를 개설하여 어린이들에 대한 포교 에 심혈을 기울였다. ‘왜색불교’ 타파를 위한 건백서 제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소위 ‘일선(日鮮) 동화정책’과 민족문화말살책의 일환으로 한 국 불교에 대한 일본화 작업을 가속화시켜 갔다. 즉 일제 당국은 승려들의 대처식육(帶 妻食肉)과 음주솔가(飮酒率家)를 암암리에 조 장하고, 나아가 주지 자격에 비구계(比丘戒)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전통을 파 괴하려고 하였다. 이에 뜻을 같이 하는 비구 승들과 함께 1926년 5월과 9월 두 차례에 걸 쳐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여 조선총독부 의 불교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불교계 의 정화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전 통을 사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추진한 대각교 활동은 일 제의 탄압으로 결국 자진 해소되었다. 1938 년 대각교는 ‘조선불교선종 총림(叢林)’이라 는 명칭을 표방하였다. 이는 당시 선학원 계 열 승려들이 조선 불교 선종(禪宗)을 내세우 면서 선풍의 재기를 기하는 움직임에 합류하 는 형식을 갖춘 것이었다. 이처럼 백용성은 조국과 민족에서 동떨어진 산중불교가 아니 라, 민중과 아픔을 같이 하는 현실 불교를 추 구하였다. 1940년 2월 24일 목욕재계 한 뒤, 제자들을 불러 놓고 “그동안 수고했다. 나는 간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이 때 나이는 77세요 법랍(法臘)은 61세였다. 대 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백용성 영정과 그의 자작 한시(왼 쪽, 이상 독립기념관 제공) 백용성 등이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반발하여 제 출한 『건백서』 1945년 12월 대각사를 방문한 김구 등 임시정부 요 인들(죽림정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