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page

이달의 순국선열 • 홍진 선생 57 평양의 남산현(南山峴) 교회 에서 전도사로 있었다. 상하이로 망명, 한성정부, 상하이 임시정부 등을 통합 1919년 3월 1일 독립선 언 직후 서울에서 이규갑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 하였다. 서울과 경기도 지역 을 중심으로 법조계·기독교 계·유교계·학생 등 각계 인사들과 접촉하면 서 비밀독립운동본부를 두고 극비리에 임시 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3월 17일 이규갑· 이교헌·윤이병·윤용주·김사국·민강 등과 법 관양성소 출신의 검사인 한성오(韓聖五)의 집 에 모였다. 이 회합에서 정부의 이름은 ‘한성 정부’, 정부수반의 명칭은 ‘집정관총재’, 각원 은 ‘총장’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집정관총 재에 이승만, 국무총리 총재에 이동휘를 비 롯하여 각부 총장과 평정관·파리강회회의 대 표 등을 선출하고, 정부의 헌법인 약법(約法) 도 제정하였다. 이로써 한성정부 조직안이 만들어졌다. 중국 상하이에서의 임시정부 수립 여부 를 확인하기 위해 4월 8일 한남수를 상하이 로 파견하였다. 한남수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4월 15일경 이규갑과 함께 ‘한 성정부 조직안’을 성냥갑 속에 숨겨 상하이 로 건너갔다. 이때 압록강을 건너면서 이름 을 홍진(洪鎭)으로 바꾸었다. 4월 23일 김사 국을 비롯한 학생들은 서울시내 서린동 봉춘관에서 국민대회를 열 고,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13도 대표자 명의로 된 「국민대회취지 서」와 각원 명단 및 약법이 들어있 는 선포문을 배포하였다. 이로써 한성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홍진이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상하이에는 이미 임시정부가 수립 되어 있었다. 4월 8일 국내에서 강 대현이 가지고 온 ‘임시정부안’을 기초로 하여,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4월 30일 임시의정원에서 충 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7월 8일에는 법 제위원장을 맡았다. 9월 11일 러시아 연해주 지역·한성·상하이에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가 통합을 이루었지만, 각료들이 취임하지 않자 국무총리 이동휘를 찾아가 조속한 취임을 촉 구하였다. 홍진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기사와 ‘취임사’가 실린 『독립 신문』 기사(1926년 9월 3일 자) 군무부장 조성환이 임시의정 원 의장 홍진에게 보낸 군사  보고(1942.10.27) 한국 각 혁명단체 주최 재중국 자유한인대회에서 발언하는 홍진 (1943.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