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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노응규 의병장 57 운 항전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정모(鄭某) 로 성명을 바꾸고 광주(光州)의 일족 노종룡 (盧鍾龍)을 찾아가 기우만(奇宇萬) 등을 만나 재기를 도모하며 전북 순창의 이석표 집에서 반 년가량 머물렀다. 1906년 충북 황간에서 재차 의병 봉기 1897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도움으 로 부형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요청하였 고, 그해 말에는 고종에게 「지부자현소(持斧 自見疏)」를 올려 특별사면을 받았다. 1898년 부형을 살해한 안의 관아의 서리들을 단죄하 고, 1899년 고향에 돌아와 형의 장사를 지냈 다. 1902년 규장각 주사에 임명되었고, 1905 년까지 경상남도 사검(査檢)겸 독쇄관(督刷 官)·중추원 의관(議官)·동궁 시종관(侍從官) 등 을 역임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사5조약, 제2차 한일의정서)’이 체결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노 승용(盧昇容)과 노종룡을 찾아가 재기를 모색 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이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 서 일으킨 의병부대에 합류했으나 패하여 흩 어지고 말았다. 이후 같은 일족인 노승용의 향리 창녕군 이방면 용배동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1906년 가을 충북 영동군 황간(黃 澗)에서 의병을 일으켜, 매곡면 일대를 의병 훈련소 삼아 인근의 문태수·이장춘 의병부대 와 합동훈련을 실시하고, 경부철도 파괴, 열 차 전복 등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 년 1월 21일 서은구·엄해윤 · 노승용 · 김보 운 · 오자홍 등과 함께 충북 경무서 산하 황간 분파소 순검들에게 붙잡혔다. 그 뒤 한성경 무소 감옥에서 옥중 투쟁을 벌이다가 같은 해 2월 16일(음력 1월 4일)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하였다. 노응규 의병장 순국 제117주기를 맞아 2024년 4월 12일 오전 경남 함양군 주관으로 안의면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함양 군청 제공). 계봉우의 「의병전」(五)에 실린 노응규 열전 부분 (『독립신문』, 192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