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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황병길 선생 57 한 일본이 급격하게 세력을 팽창시켜 대한제국에 대한 침 략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상 황에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이 어려워지자 러시아 연해주 (沿海州) 연추(煙秋) 지역으로 망명했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5조 약이 강제로 체결되자(을사늑 약), 이때를 전후하여 많은 애 국청년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만주(중국 동북지역), 연해주 등 해외로 망 명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게 되다. 이 무렵 황병길은 훈춘지역 일대에서 1908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 이범윤(李 範允)의 산포대(山砲隊)에 참가했다. 또 같 은 해 연해주의 부호 최재형(崔在亨)의 후 원으로 활동하던 안중근 지휘 의병대에 참 가하였다. 그리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 도 회령 · 온성 · 경원지방의 일본군 수비대를 여러 차례 공략했다. 두만강 건너 일본군 수비대 습격, ‘훈춘호랑이’라는 별명 얻어 특히 함북 경원군 신아산(新阿山) 주둔 일 본군 수비대를 습격했을 때는 혼자서 일본 군 14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용맹으로 후일 ‘훈춘 호랑이’라는 별 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3 · 1독립만세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나자, 북간도 훈춘 지역에 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훈춘현(琿春縣) 에 거주하고 있던 황병길은 노종환(盧宗煥)· 양하구(梁河龜) · 이명순(李明淳) 등 동지들과 미주지역 발행 『신한민보』에 실린 「황씨의 의거」 보도 기사 일제의 비밀보고서 「훈춘의용대 조직(琿春義勇隊組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