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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김종태 동지는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공사판과 공장을 떠돌며, 노동자의 처참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77년부터 교회 청년들과 함께 전태일 추모회를 하는 등 동일방직사건에 많은 지원세력이 되었으며,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위해 노력했다. 김종태 열사가 정신적 타격을 크게 입은 것은 79년 9월12일 Y.H사건 이후 “한울 야간학교”교사들이 경찰서로 연행되고, 학생들은 강제 해산될 때부터였으며, 방위병에 소집된 후에 그렇게 기다리던 민주주의가 광주학살로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분노를 참지 못했다.
80년 6월7일 열사는 “광주시민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내용의 유서를 이해학 목사님께 전달할 것을 당부하고, 5월9일 이대앞 네거리에서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면서.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