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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공은 동지들과 바로 대구 큰장날인 3월 8일을 기하여 서남시장의 수천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드디어 대구시민들이 이에 합세하여 일제히 봉기함으로써 독립의 함성은 대구고을을 뒤흔들었고 의거의 대열은 대구의 거리를 뒤덮었다. 시외행렬이 동성로 3가에 이르자 멀리 포진하고 있던 일본군경들은 의거대중을 향해 무자비한 총검을 휘두르니 이때 공과 그 아들 용해가 저들의 만행에 찌기고 쓰러져 끝내 그 아들용해는 숨을 거두고 말았으며 공은 투옥되어 2년6개월의 갖은 고초를 당하게 되었다. 공은 출옥하자 징역노임으로 순국한 아들의 무덤앞에 순의비를 세웠으니 그날의 통한을 어찌 다 필설로 감당하리오. 그 후 전도사가 된 공은 다시 뜻을 품고 도일하여 교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우리의 어문배척정책에 투구하였으나 문초끝에 강제추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귀국하여서는 달성구지에 교회를 세워 시무하던중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또 구금되는 등 그의 항일투쟁은 추호도 굽일 줄을 몰랐다. 그러너 공은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보지못하고 1941년 7월 19일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니 너무도 애통하도다. 배는 김갑만여사요 녀는 명조로 여규진에 출가하였다. 1955년 7월 12일 공의 유해는 대구 선열묘지에 봉장하고 1986년 3.1절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86년 가을 국비영달로 이 비를 세움에 있어 공의 뒤를 이어 제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