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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2025년 2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제의를 받아 항전 방략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후 5월 하순 의병 투쟁을 종료하고 고향으 로 돌아갈 때까지 한 달 동안 청송·의성 일대 를 전전하면서 수차 관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5월 14일 청송 감은리(甘隱里) 전투, 5월 20~25일 의성군 금성산과 비봉산 일대 에서 벌인 공방전 등이 그 대표적인 격전이 다. 그 뒤 김하락 등이 경주 방면으로 남하를 계속한 데 비해, 구연영은 5월 하순 30여 명 의 군사와 함께 이천으로 돌아왔다. 경기 · 경 상도를 무대로 거의 반년간 전개한 의병 투 쟁은 이로써 끝나고 말았다. 기독교 수용과 구국회 활동 1896년 여름, 고향으로 돌아와 광주군 도 척면 노곡리에 정착한 뒤 기독교에 투신하 여 새로운 구국 투쟁의 길을 모색하였다. 기 독교를 수용하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지만, ‘모든 생각과 계획을 일소하고 춘몽을 깬듯 이’ 1897년 2월 서울 남대문 의 상동교회로 스크랜턴(W. B. Scranton) 목사를 찾아가 입문 하게 되었다. 상동교회는 당시 기독교 항일 독립운동의 본산 으로 기능하던 교회로, 전덕기 (全德基) 목사가 조직한 상동청 년회(尙洞靑年會)가 그 중심에 있었다. 기독교에 입문한 뒤 교 회 활동과 구국 투쟁을 일체화 시켜 추진하는 과정에서 상동 엡윗청년회와 그 후신인 상동청년회에 참여 하였고, 전덕기의 지도와 영향을 받았던 것 으로 보인다. 1899년 3월에는 이천 지역에서 최초로 설 립된 광주군 마장면 덕평리의 덕들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 이후 자신의 집에 노루 목교회를 세웠는데, 집 앞에다 장대 끝에 십 자가를 달아 세워놓고 예배를 보았다고 한 다. 1902년에는 지역 교회를 관리할 수 있는 직분인 권사가 되었다. 이 무렵 광주에서 이 천 읍내로 이주하였고, 이천 구역 24개 교회 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1902년경 기독교 신앙을 구국 투쟁으로 승화하고자 이천에서 애국 단체인 구국회(救 國會)를 결성하였다. 구국회는 기독교 교리와 신앙에 따라 믿음·소망·사랑 등 세 가지 강령 을 실천하여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는 데 목 적을 두었다. 구국회의 활동은 이즈음 이천· 여주·광주 일대에서 기독 교세가 급격히 팽 구연영의 묘와 묘비(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