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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어서인지 많은 탐방객들이 있었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도리산리(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에서 신광식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를 따라 족향인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와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애독하고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졌다. 1905년,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사직하고 단발을 결행한 뒤 낙향하여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장지연이 신채호를 발견,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11월 20일,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채호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집필을 도왔으며 장지연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이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6년에 박은식의 도움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하던 시기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특히 신채호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로 평가받는 독사신론을 1908년, 그의 나이 불과 29세에 발표한 것은 이런 활발한 저술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기호흥학회, 《가정잡지》, 《대한협회 월보》 등에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