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page


56page

호는 송재이시니 어려서 기품이 영철하고 지절이 고결하더라. 자라서 왜관보통학교에 입학 일제치하 일본인들의 차별과 박해와 멸시를 통감했으며 졸업한 뒤 뜻을 세워 대구고등보통학교 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하셨다. 당시엔 3.1운동뒤라 온 민족이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적인 의분의 화염이 식을 줄 모르고 3천리 강토를 뒤덮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1929년에 광주학생운동이 봉기하자 공께서는 분연히 궐기하여 배일운동에 솔선 참여했으며 1931년엔 우리의 민족성과 고유문화 및 역사성의 말살정책인 황국 신민화 교육을 강제로 주입시키려는 일인 교사를 배척코자 동맹휴학을 주도적으로 감행하여 일제에 항거 고초를 겪었으며 학교를 졸업 후 공께선 비분강개하며 충천하는 애국의 일념을 굽힐줄 몰랐으며 배일사상은 더욱 공고했었다. 당 지역의 동지 이두석 정행돈 박형동 등 70여인을 규합하여 성진회 형평사등 사밀조직을 결성 망국의 치욕을 씩기 위한 독립쟁취의 길은 오직 농촌계몽과 민족계몽운동을 펼쳐 민족주체사상과 독립자존정신을 함양시키는 길만이 유일한 길이라 믿고 사생취의 살신성인의 충정으로 야학을 통해 교도하며 항일교국 및 주권 회복운동의 선봉에서 심혈을 경주하시다가 1938년 2월에 사실이 발견되어 왜관경찰서에 체포되고 대구서로 이송되어 왜경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며 1년 9개월간의 옥고를 치룬 뒤에 금천형무소에서 출옥하셨다. 만신창이인 몸을 향리에서 요양하며 노령이신 부모님을 봉공하시다가 일제치하의 국내에선 항일운동이 불가함을 느끼신 공께서는 곧 만주로 건너가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수년간 계속하시다 귀국하셨다. 그 후 일경의 감시의 눈을 피해 위장사업체인 인쇄소를 설립하여 암암리에 배일교재를 인쇄 배포함을 지속하셨다. 인생의 황금기인 20대에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해 몸바쳐 일제에 항거하셨던 공께서는 광복된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됨을 몹시 슬퍼하셨다. 만인이 추앙하는 애국자로서 민선초대 석적면장으로 취임 위정 치하에서 수탈 당해 피폐한 농촌을 복흥시키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했음에 지역민은 격양가를 부르며 공의 치적에 대한 칭송의 소리가 자자하였도다. 공께선 정포은 선생의 후손인 조천 정일헌 공의 따님을 맞아 2남 4녀를 두셨으니 자는 수현 수구며 녀는 수증 혜숙 숙자 방희요. 서는 장병학 장영배 조익순 황용섭이니 모두 성가해 다복한 가정을 이루어 남 못지 않게 영달 번연했으니 이는 마땅히 공의 보살핌의 은덕을 입은 여경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