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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백용성 선사 55 암으로 출가하여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 로, 혜조율사(慧造律師)를 계사로 불법 수도 의 길에 들어섰다. 해인사에서 불법에 귀의한 이후 40세 남짓 까지 전국의 명승 대찰(大刹)을 두루 찾아 다 니며 수행 정진하면서 불법을 깨우치고, 44 세 때인 1907년 9월 중국으로 건너가 약 2년 동안 중국의 5대 명산과 북경(北京) 관음사 등의 주요 불교 성지를 순례하였다. 이 여행 을 통해 국제 정세와 시대의 변천을 몸소 체 험하게 되었는데, 그 같은 경험은 이후 대각 교(大覺敎)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대각사 창건 1911년 해인사에서 상경하여 우선 신도의 집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여 대중불교와 호 국불교로서의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어갔다. 같은 해 4월 서울 종로구 봉익동 1번지(현재 종로 3가)에 대각사(大覺寺)를 개창하여 본 격적으로 대각교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그가 평생의 업으로 생각한 대각교운동이란, “내 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는 것 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대 각교운동의 본산인 대각사는 대중불교와 호 국불교의 전통을 전파하는 포교소이자 수행 장이었고, 한용운 등 많은 불교계 민족운동 가들이 조국과 민족의 장래에 대해 논의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대표로 참여 이러한 연계선 상에서 한용운의 권유로 민족 독립의 제단에 헌신할 것을 각오하고, 1919년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로 불교계 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당시 천도교의 최 린, 기독교의 이승훈 등과 함께 3·1운동을 앞 장서 추진하던 한용운은 2월 25일경 대각사 로 찾아왔다. 그는 백용성에게 지금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講和會議)가 열리고 있는 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각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니 참여하라고 권 유하였다. 이에 흔쾌히 승낙하고 독립선언서 에 민족대표로 날인할 인장을 거리낌없이 내 주었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 동 태화관에서 천도교, 기독교 등 다른 종교 백용성의 한문 편지와 유묵(왼쪽, 오른 쪽), 홍병기의 친필 유묵(가운데) 백용성이 불교 대중화운동을 전개한 대각사 정문의 모습 (이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