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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윤재 선생 55 1929년 10월 31일 이극로(李克魯)가 한글날 에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31 년 1월 6일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 간사에 선 임되었고, 이후 조선어사전 편찬의 전임위원 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7년 6월 수양동 우회 사건 발생 전까지 우리말 주해 작업에 몰두하였다. 아울러 1933년 겨울부터 단독 으로 중사전 규모의 조선어사전의 편찬을 시 작하여 2년 동안 작업하였다. 1937년 6월에 이른바 ‘수양동우회사건(修 養同友會事件)’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한 결과, 1941년 11월 17일 고등법원에서 무죄 방면 되었다. 1942년에는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한글 수 호 운동이 민족독립운동임을 분명히 밝히며 “민족의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 라를 사랑하는 길이 되 고 또 민족 운동이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조선어학회의 동지들 과 함께 언어독립운동 인 한글운동을 전개하 였다. 그러자 일제는 ‘조 선어학회 사건’을 일으 켜 탄압하였다.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42년 10월 함남 홍 원경찰서에 구금되었으 며, 일제 형사들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했다. 결국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3 년 12월 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 였다. 1991년 경남 김해시 봉황동 김해도서 관 앞에 세워진 ’환산 이윤재선생 어 록비‘(뉴시스 제공)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 이윤재의 경성복심법원 예심종결 결정서 (1938년, 국가보훈부 제공) 일제 당국에 압수되었던 『조선말 큰 사전』 원고(국가유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