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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안무 장군 55 성되었다. 또한 여기에 경찰대 갈성(葛城) 경 시 이하 11명과 이미 삼둔자전투에서 독립군 에게 패한 바 있는 신미(新美)중대의 병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연합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섬멸하기로 했다. 당시의 정황을 보도했던 『독립신문』 1920년 12월 25일자에서는 “사령관 최진동과 부관 안무 는 동북산(東北山) 서간(西間)에 재(在)하여 지 휘케 했다”라고 하여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을 부각하고 있었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약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1920년 10월 21일 이후에는 청산리전투 에 참가하여 부대를 지휘하며 전투를 승리 로 이끌었다. 일제는 1920년 8월 이른바 ‘간 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계획(剿討計 劃)’을 확정하고 만주지역 독립군단에 대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시도하였다. 이후 일 본군의 추격이 계속되고 이 과정에서 무고 한 양민들에 대한 학살과 방화 등이 계속되 자 김좌진·홍범도 등과 함께 10월 16일 경 작 전회의에서 일본군과의 일전(一戰)을 통해 독 립전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안무의 국민회군 은 제1연대로 편성되었던 홍범도 연합부대 에 소속되어 활동하면서 완루구전투, 어랑촌 전투, 고동하전투에서 활약했다. 청산리독립 전쟁에서 일본군은 수백명이 살상되는 피해 를 입었다. 이후 국민회군을 이끌고 북만주의 밀산(密 山)을 거쳐 1921년 2월 초 러시아 연해주의 이만에 도착하였다. 이 해 4월 경 대한국민회 군은 ‘대한의용군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 部)’라는 통합군단에 참여하여 홍범도·서일· 지청천·이용·오하묵 등과 함께 부대를 정비 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새로운 준비에 착 수했다. 그러나 만주지역 독립군단의 기대와 달리 1921년 6월 28일 이른 바 ‘자유시참변’ 이 발발하자 부하들과 함께 연해주를 탈출하 여 북간도로 돌아왔다. 북간도 지역에서 재기 준비하다가 전사 이후 중국 연변지역에서 옛 동지들과 함 께 독립군의 재건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 다. 특히 왕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 근 거를 둔 독립단 북로사령부 사령관을 맡기도 했다. 이밖에 1923년 2월 상하이에서 임시정 부 주도하에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10인 의 국민위원 중 1인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4년 9월 6일 오후 3시경 북간도 용정 에서 서쪽으로 30리쯤 떨어진 마안산록(馬鞍 山麓)의 한 가옥에 잠복하고 있던 중에 이를 탐지한 용정 일본영사관경찰서 관헌의 습격 을 받았다. 안무는 같이 있던 2명의 대원들과 함께 격렬한 총격전을 전개하며 탈출을 시도 했으나 이 과정에서 복부에 중상을 입었다. 근처 자혜의원으로 이송되었지만, 9월 7일 아침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1980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