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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 왜경에게 탄로 일제히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도 백절불굴 경사감내 특히 공은 당시 공주재판소 법정에서 판사에게 연석을 내던지며 항절하다가 형이 가중되어 함흥형무소에서 금고 9년의 독감방 장기 옥고를 치르고 출옥후에는 소위 요시찰인으로서 일절의 사생활 간섭 속에 지극한 강압을 받어가면서도 동지 명우공이 설립한 농민학원에서 자진 한문 교사로 빈곤 자제 교육에 봉사하다가 역시 왜경의 강압으로 단교되다. 기후 8.15 광복 후에는 민족단결의 국민운동을 주장하면서 임천면 점리 자택에서 사숙을 개설하고 빈곤자제에게 한문을 무료 교습시키다. 이때에 사손 승두가 천재적 총명으로서 미래의 동량지재임을 예측하고 기 교육에 전력을 경주하였으나 빈한한 가세에 학자 조달에 급급 초지를 불굴하고 지역인사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서울대학 법과를 수석으로 졸업시켰으나 후일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의 영예를 보지 못하고 서기 1957년 9월 28일 향년 69세를 일기로 귀천하다. 후사는 남 인호 여 조남준 김기인 유재광 손 승두 승곤 승원이다. 오호장재라. 공이 일찌기 쌓은 구국애족의 투지에 겸하여 투철한 교육열은 필설로 난형하겠다. 기후 혼을 진모하기 위하여 서기 1967년 부여 애국동지회 대표 강용구 이호철 서울 광복동지회 대표 김중화 등 인사들이 발기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입비사업을 추진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이분들이 작고 후 심체중 지역사회 교동지들이 재발기기 뜻을 이어 추진하여 이 비를 세워 후세에 전하노라.
서기 1975년 3월 1일 건립추진위원회 위원 이재헌 광주인 정창환 근찬 경주인 김일제 근서